4월 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 5,31-47
< 위선의 스트레스가 죄의 원인이다 >
범고래는 덩치가 7~8미터에 달하는 검은 색 등과 흰색 배를 지닌 동물입니다.
그런데 2010년 틸리쿰이라는 한 고래가 그의 조련사 ‘돈 브랜쇼’를 공연 도중 물어서 사망하게 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착하던 범고래가 여 조련사를 물고 이리저리 휘저으며 풀장 안을 돌아다닌 것입니다.
브랜쇼는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왼쪽 팔은 골절되고 팔꿈치는 탈구되어 잔인하게 죽었습니다.
브랜쇼는 시월드에서 16년 일한 베테랑 조련사였고 틸리쿰과는 14년을 함께 일했을 정도로 친했습니다.
시월드 측은 사고라고 주장했지만 야생에서 범고래에게 인간이 공격당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범고래는 왜 그 오랜 우정을 깨고 자신의 조련사를 죽였던 것일까요?
범고래는 어미와 새끼의 교감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틸리쿰은 어렸을 때부터 어미와의 교감 없이 수족관에서 훈련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가족의 애착형성 없이 그저 인간을 위한 쇼와 번식용으로 사용되었던 틸리쿰은 그 쌓인 스트레스를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2살 무렵 포획되어 다른 범고래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좁은 물탱크에 수용되어 살았던 틸리쿰의 저 행동을 우리는 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본성대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본성대로 살지 못하게 강요한 인간의 죄가 더 클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이유도 이와 같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사람인데 자꾸 하느님처럼 살라고 하니까 힘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쌓이는 스트레스를 죄로 푸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모르는 아이는 욕심을 부려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남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법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기처럼 남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다시 말해 어른이 되어야하는데 자신을 여전히 아기처럼 여기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인간이라 여기면서 하느님처럼 살려는 이들이 짓게 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을 인간이라 여기면서도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하느님이라 믿었으면 그런 행동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믿음이 없으면서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려고 했던 이들이 사제들과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본성적으로는 그렇지 못한데 남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살려다보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낮과 밤은 매우 달랐을 것입니다.
낮에는 하느님의 자녀로, 밤에는 죄인으로 산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합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두 발로 걸었다고 그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성이란 자신이 편해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은 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됩니다.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세리와 창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죄는 짓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자신들이 속아서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상태면 구원 받기 매우 어렵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큰 죄가 아니면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도 마치 아버지가 유산을 달라는 작은 아들에게 유산을 준 것처럼 인간이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인간이 죄인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단식하면서 얼굴을 찌푸리면 안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일을 죽음까지 무릅쓰며 해내십니다.
그리고 그 하시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어디 다른 데 풀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존경하라고도, 당신의 행동에 감사하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살지 않는 이들도 탓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그 일을 함으로써 만족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행동을 하면서도 만족하신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데로 하나도 빠짐없이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그분은 본성이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도 예수 그리스도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 스트레스로 다른 풀 거리를 찾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온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그분처럼 사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의 수준을 알면 됩니다.
믿음을 더 증가시키려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면 마치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 등을 보며 사람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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