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일 [사순 제3주일]
복음: 루카 13,1-9
<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봉헌하는 것이다 >
공자와 그의 제자 안자가 함께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 배의 사공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노를 저어갔습니다. 안자가 물었습니다.
“나도 노 젓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사공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연습만 하면 곧 배울 수 있고, 잠수에 능한 사람은 배를 본적이 없더라도 바로 노를 저을 수 있습니다.”
안자가 사공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은 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노 젓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어 빨리 배울 수 있고, 잠수에 능한 자는 배가 뒤집어져도 당황하지 않기 때문에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두려움은 우리가 무언가 배우고 도전하는데 가장 큰 장애요인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엉덩방아 찧는 것이 두려웠다면 어떻게 스케이트를 배울 수 있었겠습니까?
두려워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두려움은 내가 다치거나 죽거나 손해볼까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보호기능입니다.
내가 죽으면 그래서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우리 안에는 죽어야 하는 ‘나’가 있습니다.
이것을 죽이면 두려움이 사라져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회개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니 두려움을 사라지게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선 회개하지 않으면 그 두려움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부터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포도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십니다.
다른 포도나무는 다 열매를 맺는데 무화과나무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열매는 무엇일까요?
포도원지기가 원하는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사랑’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위해 포도원지기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포도 재배인’으로 등장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포도 재배인이 왜 무화과나무에 집착하실까요?
이 무화과나무는 왜 포도밭에 달랑 한 그루만 심겨져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무화과나무는 스스로 포도나무와 다르다고 믿고 있는 나무입니다.
본성은 자신이 무엇이라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늑대라 믿으면 늑대가 되고 자신이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이 되며 자신이 예수라 믿으면 제2의 예수가 됩니다.
무화과나무는 그래서 자신이 특별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믿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크게는 자신들만 선택받았다고 믿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여길까요?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타인과의 차별을 두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런 경우 성을 쌓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그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해치는 자는 몇 배로 보복할 것이라 선포하며
자신만의 성을 쌓습니다.
로마도 힘이 강대할 때는 그러지 않았지만 점점 힘이 약해지자 성벽을 쌓아 적의 침임을 막으려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허물어진 실로암 탑이 이 상징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파견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만 합니다.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내 뜻이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파견되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파견 받습니다.
그러나 상처받기 싫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성호경도 긋지 못합니다.
이렇게 두려움이 있다는 말은 아직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회개를 위해서는 진정으로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상징으로 빌라도가 제물을 바치려는 사람들을 죽여 그들의 피가 제물에 물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예로 드십니다.
제물을 바치는데 자신은 죽지 않으면 그 제물은 아무 쓸모없습니다.
그냥 남는 제물을 바치고 자신은 죽지 않으려하니 그런 사람은 신앙을 지니고 있어도
두려움 때문에 온전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봉헌하는 예물에 나의 피를 함께 물들이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기 때문에 그 봉헌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봉헌은 자신의 교만의 탑이 무너지게 하여 자아를 죽이기 위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섞이며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미국 CBS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서바이버’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우승한
‘권율’ 씨가 강연을 목적으로 한국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서바이버란 오지에서 이루어지는 생존게임으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는 프로그램입니다.
당시 ‘권율’이란 한국 이름으로 참가해 국내에도 큰 이슈가 되었었는데, 5만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승까지 했기 때문에 국내에도 많은 분들이 권율 씨를 알고 있습니다.
예일대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이런 특이한 방송에 나가게 된 것은
바로 두려움의 극복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인종차별과 강박증으로 인해 공황장애를 겪었던 권 씨는 지금의 두려운 삶을 이겨내기 위해선 ‘내가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이후부터는 ‘두려운 일에 오히려 도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 했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데도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의 오바마 대선 캠프에 들어가고, 예일대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 자격증도 따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서바이버 경쟁에 도전하여 우승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두려움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돈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봉헌을 더 많이 해 보면 됩니다.
그러면 돈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러면 돈이 더 많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를 한 사람이 하게 되는 행위입니다.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더 기도와 봉사를 많이 하면 됩니다.
그러면 더 시간적 여유가 있어짐을 느낄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두려운 사람과 더 함께 하기 위해 다가가면 됩니다.
그러면 생각보다 친절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남들에게 평가받는 것이 두려우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당당하게 나의 것을 드러내어 많은 평가를 받아보면 됩니다.
그러면 남들의 평가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로에서 안전지대만 찾는 사람은 운전을 할 수 없습니다.
운전을 즐기려면 안전지대에서 나와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지 않으셨다면 당신도 세리와 죄인들과 섞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 자아를 죽여야만 온전해진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제물을 바치며 자기 자신 또한 바치는 것입니다.
렙톤 두 닢을 바치는 과부는 내일 먹을 음식 값까지 다 주님께 바쳤기 때문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나의 욕구 중에 소유욕과 육욕, 교만이 있는데 제물을 봉헌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다 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두려움을 없애는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제물에는 항상 내 자아의 피가 섞여야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은 또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봉헌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해보십시오.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자아를 죽이기 위해 두려움과 맞서
내가 두려운 일에 도전하게 만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