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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3-19 조회수 : 580

3월 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복음: 마태오  1,16.18-21.24ㄱ 
 
​“내 탓이오!”에 숨겨진 천상의 지혜 

네 명의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커다란 사고가 미국의 고속도로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의 젊은 희생자들의 시체 사이에서 부서진 위스키병 조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고의 원인은 음주운전이었던 것입니다. 
 
그 희생자 중의 한 소녀의 아버지는 그의 아름다운 딸이 그러한 뜻밖의 죽음을 당한 것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아이들에게 술을 준 사람을 찾아내 그 한을 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음료들을 비치해 둔 자신의 집 찬장에서 뜻밖에도 딸의 쪽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빠, 저희가 아빠의 술 몇 병을 가지고 갑니다. 괜찮으시겠지요?”
내가 남을 심판하게 될 때 나의 불의함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사실 내가 의롭지 못하기에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자신의 불의를 감출 필요가 없기에 남의 허물을 굳이 들추어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상대가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변화는 질책이 아니라 포옹으로 일어납니다. 
이 포옹이 의로움입니다. 
돌아오는 탕자를 아버지가 안아 동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자신이 맞아주려 한다면 그 아버지가 의로운 것입니다.  
 
아버지마저 자녀를 나무란다면 자신이 그렇게 잘못 키운 것까지 나무라는 것이 됩니다. 
남을 나무랄 때 자신도 나무라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너는 의로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너는 나의 나라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 성인은 의로움의 상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셉 성인이 어떻게 의로움의 상징이 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약혼자가 임신한 것을 발견하면 매우 격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자신이 임신시켜놓고 파혼하는 것처럼 꾸미려합니다.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은 파렴치한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타인의 잘못을 자신이 뒤집어쓰는 것을 의로움이라 가르칩니다.
어차피 우리의 죄도 예수님께서 다 짊어지시고 인간에게는 죄가 없다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의롭게 되셨습니다. 
그 의로움을 받은 우리들이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면 그 사람은 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나무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기억하기 위해 미사 때마다 “내 탓이오!”를 외칩니다. 
이는 나의 잘못만 내 탓이 아니라 이웃의 죄도 나의 탓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내 탓이라고 할 때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까지도 나의 탓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요셉 성인을 닮은 의로움으로 이끄는 기도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 성인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성모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사실과 그 아기는 세상의 구세주가 되실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의로운 사람만 이런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어떤 은총도 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입니다.
죄가 많은 만큼 타인의 잘못도 잘 찾아냅니다. 
 
노아가 술을 마시고 벌거벗고 자고 있을 때 세 아들 중 함이라는 아들은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나머지 두 형제는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싶지 않아 뒤로 돌아서 들어가 옷으로 아버지를 덮어드렸습니다. 
이렇게 의롭게 된 두 아들은 큰 축복을 받고 함은 저주를 받습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지 못합니다. 
자신도 큰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로운 사람은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삼으며 덮어준 기억이 있나 살펴봤습니다. 
불행하게도 잘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내가 내심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시시비비를 가려서라도 나의 불의를 극복하고 정당한 사람이 되려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내 탓이오!”를 할 때 나에게 잘못한 사람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에 대해 내 심장을 치려고 합니다. 
그렇게 의롭게 인정받아야만 지금 받지 못하는 은총도 받을 수 있습니다. 
더 받기 위해 그만큼 달라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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