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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3-05 조회수 : 507

3월 5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 사람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 > 

생활고를 비관해 세 모녀가 반지하 단칸방에서 번개탄을 켜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10위 경제대국인 우리나라복지정책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많은 비판 글이 올라왔었습니다.  
 
그런데 “KBS 뉴스 [취재후] ‘복지’ 대신 ‘죽음’ 택한 세 모녀”란 기사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어서 간추려 소개합니다. 

2년전, 서울 송파구의 한 단독주택 반지하에서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어머니 61살 박모 씨와 30대인 두 딸이었습니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을 때, 창문에는 청테이프가 붙어 있었고 타다 남은 번개탄이 발견됐습니다. 
방 한구석에는 흰 봉투가 놓여있었습니다.
경찰은 세 모녀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살 사건을 취재할 때 기자들이 우선 관심을 갖는 게 유서입니다. 
죽음의 배경을 알기 위해섭니다. 
그런데 이번에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건 유서가 아니라 현금이 든 흰 봉투 하나였습니다. 
이례적인 경우죠. 

봉투에는 ‘주인 아주머니께 미안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라고 쓰여 있었고, 안에는 70만 원이 들어있었습니다. 

집 주인은 이 돈이 월세 50만 원과 공과금을 합친 액수라고 했습니다. 
어머니 박 씨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집세와 공과금을 계산하고, 봉투를 꺼내 현금을 넣어뒀던 겁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에 빚을 남기지 않으려 할 정도로 박 씨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박 씨는 생활고에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친인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세 모녀는 최근 수입이 아예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박 씨의 장성한 두 딸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큰 딸은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있었지만 돈이 없어 병원 치료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둘째 딸은 신용 불량자가 돼 역시 취직이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이미 숨진 아버지의 암 치료 당시 많은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식당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던 어머니 박 씨마저 최근 팔을 다쳐 일을 못 하게 됐습니다.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이 끊긴 겁니다.  
 
두 딸의 삼촌과 외삼촌은 어머니 박 씨에게 어려운 사정을 돕겠다며 연락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지만, 박 씨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심지어 박 씨는 복지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주민 센터를 방문하지도 않았습니다. 
관할 주민 센터에 확인해보니, 박 씨는 기초생활수급자 수급 신청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박 씨가 수급자 자격이 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수급자 자격이 안 되더라도 다른 복지제도를 이용해 볼 수 있습니다.

‘긴급복지지원제도’라는 건데, 실직이나 질병으로 생계 곤란의 위기 상황에 처할 때 생계비나 주거비를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박 씨는 이마저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박 씨의 사례는 복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낮은 인식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지 혜택이 여전히 국민의 ‘권리’이기보다 ‘창피한 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죠.  
 
우리나라 헌법과 기초생활보장법은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복지제도가 중산층을 포괄하지 못하고 주로 빈곤층만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복지 수혜 = 빈곤층’ 이라는 등식의 인식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자존심 강했던 박 씨의 선택을 이상하게만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 사회에 복지는 보편적 권리라는 인식이 뿌리내려져 있었다면, 박 씨의 선택은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돌아가신 분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기사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사에는 돌아가신 분들이 자신들이 겪었던 생활고에 대해 도움을 청하거나 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말하려고 하는 것은 사회복지 제도에 대한 우리 인식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재산이 많아서 당신을 따를 수 없다는 부자청년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모두 포기할 줄 알아야합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당신을 따르려거든 부모, 형제, 재산,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 때문에 버린 모든 것의 백배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달려들 때는 내 자신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느낄 때입니다. 
부자청년은 자신의 재산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다 버렸다고 말하는 베드로도 사실은 온전히 자신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풍랑 속에서도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만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아주 작은 자존심까지도 버리지 못하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존심의 꽃이 떨어져야 백배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 씨 모자도 ‘스스로의 힘만으로 살려 하지 않고 자존심을 버리고 도움을 청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도 우리 스스로 무언가 해 보려 하기 때문에 내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참 좋은 배우자, 참 좋은 부모, 참 좋은 형제, 참 좋은 이웃이 되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좋은 은혜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우선 당신께 달려든다면 백배의 도움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2주 동안 저는 부모님을 모시고 지난 본당 신자분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다니면서 부모님은 물론이고 많은 신자분들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분들은 그렇게 많이 고마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그만한 만족을 그 많은 분들에게 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면서 한 사람을 좋아했을 때 그 한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았을 때가 기억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포기하고 제 자신을 봉헌했을 때 너무나 많은 분들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다고 무릎 꿇을 때 하느님은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백배의 힘을 내려주십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사람임을 고백하고, 그분께 무릎을 꿇읍시다. 
나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내가 그것을 봉헌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실 수 있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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