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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2-26 조회수 : 414

2월 26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집회서 2,1-11
마르코 9,30-37 
 
< 산이 될 것인가, 바다가 될 것인가? > 

이번 주일에 사목총회를 휴식도 하지 않고 급하게 마치고 겨울신앙학교 다녀온 중고등부의 인사를 빨리 받고 평소보다 한 시간 반 늦게 운동장에 나갔습니다. 
 
지난주도 바빠서 공을 차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한 시간이라도 운동을 할 의향이었습니다.
이미 경기는 하고 있었고 저도 한 팀으로 들어갔습니다. 
 
차다보니, ‘어떻게 편을 이렇게 나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대 팀의 전력이 너무 좋은 것이었습니다.
공격을 하면 수비가 비고, 또 수비를 하면 공격이 비었습니다.
중간에 서자니 항상 중간에 서 있으신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 분이 중간에서 공을 잡으면 상대팀에게 다 빼앗겨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중간에서 공을 받아 앞으로 연결해 주고 중간에서 공격도 먼저 끊어주어야 하는 중요한 포지션에 있으면서도 전혀 공을 찰 줄 모르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 분이 중간에 있는 한 우리 팀은 희망이 없어보였습니다.
물론 사제로서 그런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어 잠자코 열심히 차기는 하였지만 속으로는 그 분을 보며 참 민폐를 끼치는 분이라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한 자매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 형제님도 가끔 축구하러 나오시곤 하시는 분인데 경기에서 뛰는 것은 못 보았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들으니 그 형제님은 허리수술을 수차례 해서 횡단보도도 빨리 걸어 건너는 것도 힘겨워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 선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경기에도 들어가서 살짝살짝이라도 공을 찼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는 자신이 경기에도 뛸 수 있었다고 어린이처럼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팀의 어떤 분이 “그런 식으로 차려면 나오지 마세요. 
완전히 민폐예요.” 라는 말을 했고, 그 분은 하도 열이 받아 그 이후로 축구뿐만 아니라 성당도 몇 달 동안 냉담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뜨끔 하였습니다.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그 전 날 똑같은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속으로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냉담하게끔 만드는 그런 생각을 가졌었다는 것 자체가 반성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내가 교만해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를 판단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누가 더 큰 사람인지 서로 다툼을 하는 제자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오십니다. 
 
그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이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나무토막에 그리스도께서 달리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귀 등에 그리스도께서 타셨습니다.
버려지다시피 한 마구간에서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십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시는 나자렛 시골 출신 예수라는 한 인간을 먼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많이 배우고 돈 많고 힘 있는 자신들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뒤떨어지는 스펙을 지닌 예수를 그리스도로 높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대천사를 받아들였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품을 수 없는 하느님을 그 마음에 잉태하셨습니다. 
 
엘리사벳 또한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며 나이어린 사촌 성모님을 받아들임으로써 동시에 그리스도도 받아들여 성령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렇듯 상대 뒤에 계신 더 큰 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을 대신했고,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계셨습니다.
사람을 먼저 받아들여야 그리스도이든 하느님이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합니다. 
 
바다는 가장 낮기에 가장 많은 물을 받아들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보다 높게 여겨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이라는 것은 나를 높게 만들어 상대를 내려 보게 만들고 판단하게 만듭니다. 인간을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모든 인간보다 훨씬 높으신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가 평등합니다. 
 
따라서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산처럼 높아져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 밑에 있는 많은 사람을 판단하게 되어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전에 계속 오른 손을 위로 올리고 성체를 받는 사람이 있어서 은근히 ‘저걸 고쳐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오른 손 밑으로 보이는 왼손이 온전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고 ‘큰일 날 뻔했다.’라고 속을 쓸어내린 적이 있습니다. 
 
먼저 판단하지 맙시다.
판단하게 되면 사람도 하느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에 홀로 남게 됩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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