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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4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2-24 조회수 : 354

2월 24일 [연중 제7주일] 
 
사무엘기 상 26,2.7-9.12-13.22-23
코린토 1서  15,45-49
루카 6,27-38 
 
<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한 원수 사랑 > 
 
원수(怨讐)란 말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요즘은 ‘웬수’, ‘평생 웬수’란 말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원수란 한 마디로 적(敵)을 의미합니다. 
내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쳐 사무치는 원한을 맺히게 한 사람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생각해보니 이런 사람들도 원수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견딜 수 없는 수모를 준 사람, 그래서 대면하기 껄끄러운 사람, 같은 식탁에 앉아 밥 먹기 싫은 사람, 자다가도 얼굴을 떠올리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게 만드는 그 사람, 내 인생에 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틈만 나면 내 인생길을 가로 막는 사람... 
 
결국 원수는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살아가는 존재들이군요. 
원수는 어느 다른 하늘 아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내 가정 안에, 내 직장 안에, 내 공동체 안에,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버젓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라고 안면몰수하지 말고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꼴 보기 싫은 그 인간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루카 복음 6장 27~29절) 
 
예수님의 당부말씀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건 뭐 속도 밸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저 바보 멍청이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정말이지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듯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아무나 실천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를 탈피할 때, ‘나’라는 질그릇 안에 들어있는 과거의 자아를 완전히 비워낼 때 실천 가능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하느님화’될 때, 인간적 관점을 버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며 죄인인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남아있고 ‘하느님의 인호’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하느님께서 위대하시기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인간의 비루함과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한 사랑의 평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원수조차 사랑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진짜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죄와 사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늘 우리 곁은 졸졸 따라다니는 ‘평생 웬수’ 같은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한 세상 열심히 살아가다보니 어느 순간 그 ‘웬수’가 다르게 보일 때가 있더군요. 
그 순간은 그의 내면에 아로새겨진 깊은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에서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그의 쓸쓸하고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그의 말 못한 사정을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뒤돌아서서 흘리는 그의 눈물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나도 나약한 한 인간이지만 그도 나약한 한 인간이로구나, 그때 내게 준 괴로움이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표현이었구나, 좀 더 사랑해달라는 손짓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더군요. 
 
원수에 대한 사랑, 참으로 어려워 보이는 일이지만 그 사랑이 실현되는 곳에 놀라운 기적과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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