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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2-24 조회수 : 527

2월 24일 [연중 제7주일] 
 
사무엘기 상 26,2.7-9.12-13.22-23
코린토 1서  15,45-49 
 루카 6,27-3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삶의 여정의 변증법 >

마이크 매킨타이어란 이름의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타호 시에서 출발하여 뉴올리언즈로 차를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쯤 지나는데 한 젊은이가 도로 옆에 서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차가 어디쯤에서 휘발유가 떨어졌는지 한 손에는 휘발유가 가득 담긴 플라스틱 통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휘발유통으로 운전자들의 동정을 사서 차를 세우게 하려는 속임수인지 몰라 그냥 지나쳤습니다. 
전에 그런 식으로 차를 세워서 목에 칼을 들이대고 금품을 빼앗아가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들어서 더욱 세워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서도 사막 한가운데 서 있던 그 청년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브레이크에 발을 올려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액셀 페달을 밟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 흉흉하게 변해버린 세상과 함께 자신도 그렇게 모르는 사람에게는 적대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이크는 진정 이 세상이 그렇게 도처에 강탈범들이 즐비한 세상인가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동쪽에서 서쪽까지 횡단 무전여행을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돈은 아얘 처음부터 지니지도 않고, 중도에 누가 주어도 받지도 않고, 그저 종이에 행선지를 ‘미국’이라고만 쓰고 매일 만나는 낯선 사람들에 의해 먹고, 자고, 차를 타며 미국을 횡단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렇게 미국을 횡단하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썼으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는 낯선 사람들을 의심하고 두려워하지만 그러면서도 친절을 베푸는 많은 사람을 항상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는 길이면서도 자신보다는 길거리에 서 있는 이 사람을 위해 희생했던 나이든 여성도 만났고, 비가 퍼부을 때 예전에 강도에게 돈을 빼앗겼던 경험이 있으면서도 비 맞고 길에 서 있는 이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또 한 번 속는 셈치고 도와준 트럭운전사,  
 
이 사람에게 야영장소를 찾아주기 위해 저녁나절 한 시간이 넘게 차를 몰고 다녔던 중년 부부, 가난하지만 자신이 가진 이것저것 먹을 것을 나누어 주던 수많은 사람들,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식사를 대접했던 사람들까지 수없이 많은 사랑에 그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1가지,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 
 
본래 마이크 매킨타이어란 인물은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세상 사람들을 모두 믿었다가는 커다란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이론과 경험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을 횡단하면서 그래도 세상은 믿을만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 것입니다.  
 
결국 본래 어린아이 때의 마음으로 돌아온 것이기는 하지만 중간에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했다가 다시 친절한 사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런 것이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그 어려운 단어, ‘변증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변증법은 ‘정반합’의 원리로서 처음엔 이견이 없다가 나중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생기고 그 다음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통합되어 새로운 하나의 원리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변증법은 본래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으로써, 참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오류를 지닌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그 진리가 참다운 진리임을 밝히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을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존재론적인 변증법으로 발전시켰고, 막스가 유물론적 변증법을 주장하여 계급간의 변증법적 갈등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사회로 발전해간다는 역사적 인식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매우 복잡해 보이는 이 원리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변증법의 기초, 즉 ‘정(正)=> 반(反) => 합(合)’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엄마의 태아에서 ‘남-녀’의 구별이 없이 잉태됩니다. 
이것이 ‘정(正)’입니다. 그러나 반대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한 몸’인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알지 못하면 자신이 어떻게 참다운 남자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교회의 진리도 수많은 이단들과 맞서며 그 정체성을 찾아온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가 지나면 ‘남-녀’의 구별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테스토스테론’이란 호르몬이 분비되는 태아는 남성의 몸을 지니게 되고 그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은 태아는 그냥 여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사람이 만들어진 두 달 후부터만 해당되는 말인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이제 서로 구별되며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서로 반대됨을 알아차리게 되는 ‘반(反)’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남자와 여자가 합(合)해지게 되는 때가 있는데, 이는 태아에서 서로 구별이 없을 때의 하나인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합(合)은 서로의 차이를 아는 것이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이 합일은 더 큰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에너지를 통해 새로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핵융합에서 나오는 에너지도 이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세의 삶에서도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처음에 이스라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파라오의 집에서 자랍니다. 
이는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정’의 단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집트로부터, 또 이스라엘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함을 알고 살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또 몇년 동안 이방인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을 키워준 파라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모세에게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상대인 것입니다.
이런 년간의 ‘반’의 과정을 넘어서도록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악인 파라오에서 선인 이스라엘을 구해오라고 그를 파견하십니다. 
물론 그는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반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별할 줄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악은 버리고 선과 하나가 되게 됩니다.  
 
예수님도 모세처럼 우리에게서 악을 몰아내고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생명력으로 지금도 수많은 이들을 악을 떨쳐내고 그리스도와 성체성혈을 통해 새로 태어나 그분과 한 몸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조건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올 피해가 두렵기 때문에 분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아직은 ‘정’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 태어났는데 그 정권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따져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작정 그 안에 머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유아기에 머물렀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원수’처럼 미워진다는 것은 이미 ‘반’의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머물러 있어서만은 안 되고 ‘합일’하는 단계까지 가야만 온전한 완성과 에너지와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작정 감싸 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싸 안으면 내 마음이 그 가시에 찔림을 아주 잘 알면서도 감싸 안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완전해 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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