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묵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한 어부가 바친 ‘묵’이라는 물고기를 먹은 뒤에 이렇게 맛있는 생선은 처음이라면서 ‘은어’라는 새 이름을 하사했지요. 전쟁이 끝난 뒤에 궁으로 돌아온 선조 임금은 그때의 맛을 못 잊어서 식사에 올리라고 했고, 이 생선을 먹는데 너무 맛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이,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피난지에서는 기가 막혔던 맛이 궁궐에서는 사라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 역시 비슷한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군대에서 가서 어느 날 헌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헌혈이 끝난 뒤에 과자 한 박스를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기만 했던 훈련병 때였는데, 이 과자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바닥에 흘린 과자 부스러기까지 먹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줘도 잘 먹지 않습니다. 원래 과자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어렵고 힘들 때는 모든 것이 감사하게 여기면서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따라서 어렵고 힘든 상황도 내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순간이 바로 삶의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큰 뜻을 보여주기 위해 외적으로 보이는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 큰 뜻을 보고서 지금의 삶 안에서 변화를 갖는 것이 주님 기적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그저 깜짝 놀랄 외적인 모습만 보고 있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시지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하긴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떠올려보십시오. 마귀를 쫓아내면 베엘제불의 도움으로 쫓아내는 것이라 하고, 병자나 세리와 같이 힘없고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죄인’과 함께 하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기적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기적을 쫓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나의 변화를 이끌 주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변화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기적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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