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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2-02 조회수 : 419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복음: 루카 2,22-40 
 
< 협상의 기술: 요구가 아닌 욕구에 집중하라 > 

허브 코웬이란 작가는 “인생의 8할은 협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협상은 회사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전반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와 어느 정도 협상을 하게 됩니다. 
이 협상의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매일 싸우느냐, 사이좋게 지내느냐가 결정됩니다.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천재적인 물리학자라 불리는 파인만이 있습니다. 
그는 천재였지만 성격이 고약하여 그의 기행만 따로 모아놓은 책이 있을 정도랍니다. 
특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1965년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니 상을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타면서 만나야 할 사람들, 일주일 동안 여행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끔찍하여 이렇게 응답합니다. 
 
“됐어요. 상 받으려면 북유럽까지 오가느라 비행기를 10시간이나 타야하고 일주일이란 시간을 써야 하는데 ... 귀찮아요. 받지 않겠습니다.” 
 
이에 놀란 노벨상 재단 측에서는 갖은 회유와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 상은 초등학교 우등상이 아닙니다. 
받으시면 국가의 영광이 되는 상입니다. 
그리고 교수님, 일주일 씩 있을 필요는 없고요, 상만 받고 바로 가셔도 됩니다. 
교수님이 이러시면 앞으로 다른 미국 노벨상 후보자들에게도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인만은 “됐습니다. 귀찮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협상이 아니라 협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협상과 협박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협박은 쌍방이 둘 다 기분 좋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때 파인만의 아내가 나섭니다.
“여보,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그런데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 당신이 상을 거부하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발적으로 노벨상을 거부한 첫 인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바로 기자들이겠죠. 
그냥 며칠 고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파인만은 아내의 말에 설득당해 노벨상을 수상하러 떠났습니다.
[참조: ‘거절할 수 없는 협상의 신이 되는 법’, 웅이사의 하루 공부, 유튜브] 
 
이 이야기는 최철규 작가의 ‘협상의 신’이란 책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최철규 작가는 협상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구에 집중하지 말고 욕구에 집중하라.’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파인만이 제시했던 요구는 오랜 시간 여행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만 듣고 날짜를 줄이려는 노력과 더 나아가 협박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파인만의 아내는 남편의 욕구에 집중하였습니다. 
남편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으면 기자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상대의 욕구에 집중해야 상대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도 즐겁게 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도 통용됩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께서 아드님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들을 쓰시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참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님 뜻에 맡기는데 주님께서 즐겁지 않으실까요? 
 
아무래도 주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 무언가를 청할 때 돈과 함께 청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통틀어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인간에게 감사의 봉헌을 받는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님께 봉헌되어져야 했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기에 모든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에 그 죄가 사해졌습니다.  
 
무엇을 얻어내려면 그 무언가를 주시려는 분의 욕구를 올바로 알고 그 욕구에 합당한 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주님께는 그것이 ‘봉헌’입니다. 
 
어떤 아이가 땀을 흘리며 슈퍼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콜라 하나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아저씨는 콜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할까요? 
콜라 없다고 가라고 해야 할까요? 
그 아이는 콜라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구가 아니라 욕구를 볼 줄 아는 주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콜라 몸에 안 좋아. 완전 설탕 덩어리야. 물이나 이온음료가 어떻겠니?” 
 
상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성당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내가 원하는 것만 줄기차게 청해봐야 그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먼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러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봉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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