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사람들이 저에게 글쓰기와 말하기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쉽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매일 글을 쓰고 있으며, 남들 앞에서 강론이나 특강을 하면서 말을 자주 하기 때문에 둘 다 쉽게 하리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둘 다 어렵습니다.
매일 글을 쓰고는 있지만 도무지 써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책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아이디어를 찾고, 때로는 좋은 문장들을 메모해놓아서 인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혼불’의 저자 홍명희 선생님께서는 ‘글을 쓰는 것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나 봅니다.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쓰신 분 역시 글 쓰는 것을 어려워 하셨는데, 하물며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겠습니까?
말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글이라는 것은 나중에 수정도 가능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한번 내뱉으면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더 신경을 써서 말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것은 신부라는 입장에서 하는 말과 글이기 때문에 좋은 말을 골라서 사용해야 합니다. 사랑하라고... 긍정적으로 살라고... 기쁘게 살아야 한다고... 이렇게 말하다보면 이런 울림이 가끔 제 안에서 들리는 것입니다.
‘너는 그렇게 사니?’
내 삶과 동떨어진 말을 하는 위선자와 같지 않을까 라는 반성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들게 되면 저절로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저절로 위축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말과 글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살고 계신가요?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겸손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여전히 자신만을 높이려는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나는 교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은 이런 교만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밀 이삭을 뜯는 제자들을 향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면서 비난합니다. 즉, 안식일 법에 의하면 일해서는 안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걸으면서 밀 이삭을 뜯은 것은 추수의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부정하고 보는 교만의 마음이 억지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지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법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무조건 부정하고 보는 교만의 마음이 아니라, 무조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랑의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만을 내려놓고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글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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