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 [주님 세례 축일]
복음 : 루카 3,15-16.21-22
<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믿음 >
영국의 어떤 곳에서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곳에 세 명의 석수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장이 자신과 일할 사람을 찾기 위해 세 명의 석수에게 “당신은 왜 이 돌을 다듬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사장님이 시켜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른 석공은 “예, 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일을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사람은 “제가 다듬는 돌이 성전을 짓는데 쓰입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버니 참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세 사람의 석공 중 누가 사장과 함께 일하게 되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대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그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각자 다르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인으로 생각하며 일하고, 어떤 사람은 가장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며, 어떤 사람은 종교심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이 내가 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합니다.
다른 예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빚 하나도 없이 4천 억 자산가가 된 김승호 회장이 한 가게를 운영할 때의 일입니다.
누가 가게 앞에다 똥을 싸 놓고 간 것입니다.
직원들은 더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한 젊은 청년이 맨손으로 그 똥을 집어 치우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스스로를 그 직장의 직원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 청년은 자신을 그 직장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빠른 시간에 그 회사에서 높은 위치에 이르고 젊은 나이에 여러 가게를 가진 성공한 사장들 반열에 들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고 죽을 생각만 하고 어떤 사람은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활기가 넘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모르고의 차이에서 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남들이 다 하는 일을 하면서도 힘들어하며 견뎌내지 못합니다.
정신분석 전문의인 이무석 박사가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를 할 때 한 자해하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칼로 배를 그어 배에 수십 개의 칼 자욱이 있었습니다.
박사가 왜 자꾸 자해를 하느냐고 물으니 청년은 자신이 왜 살아야하는지 모르겠고 그냥 우주에 붕 떠 있는 느낌인데 그렇게 자해를 하고 피가 나고 쓰라린 아픔이 오면 그래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정체성을 찾아야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인 줄 알아야 두 발로 걷는 것이 의미 있고 힘들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나의 정체성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여받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 삶의 의미를 어떻게 부여받을 수 있을까요?
부모로부터 부여받습니다.
부모는 아기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으로써 아이에게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줍니다.
아이는 부모의 말에 수긍하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공부 잘 하고, 건강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궁극적으로 부모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자녀가 대신 살아주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아이가 키워졌다면 늑대처럼 사는 것이 그 아이의 삶의 의미이자 가치입니다.
존재하게 한 자만이 그 존재하게 된 이에게 그 존재이유를 알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은 부모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부모는 나에게 다시 생명을 줄 수도 없고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해 줄 수도 없으며 나 또한 누군가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나의 창조자가 부모가 아니었음을 은연중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정체성에 대한 방황이 시작됩니다.
다시 왜 살아야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 고민은 이 질문으로 종합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서 자신의 창조자를 찾지 못하면 아이는 한없는 혼란 속에 빠집니다.
공부도 하고 일도 해야 하고 자녀도 낳아야하지만 그런 힘든 일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에 일 하면서도 힘들고, 결혼생활 하면서도 힘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하기는 해야 하니까 죽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때 하느님이 나의 창조자이심을 알게 되는 것만큼 큰 은총은 없습니다.
이렇게 “아, 나는 이것을 위해 태어났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우리는 종교적으로 ‘세례’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이 나의 창조자이시고 그 하느님의 의도를 알게 되면, 어떤 일을 하던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페루 리마의 성인 중 빗자루 수사로 불리는 마르티노가 있습니다.
그분은 흑인 신분으로 평생 빗자루질만 해야 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거지 하나를 하더라도 기쁠 수 있다면 참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데서 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아직 그 가치와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진정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살찐 여우를 발견하고 ‘저 여우는 어떻게 해서 살이 쪘을까?’ 하고 궁금해 했습니다.
그가 관찰한 결과 여우는 사자가 먹이를 먹는 장소에 있다가, 사자가 먹이를 먹고 사라진 다음 남은 먹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도 여우처럼 살면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부자들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자신들이 남은 것을 이 사람에게 결코 주지 않았습니다.
허기져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을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대는 왜 사자가 되지 못하고 어리석은 여우와 같은 행동을 하는가?”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을 만들어주신 분을 만날 때 확립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아버지의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자녀로 목수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살아야 하는 새로운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30년 간 목수의 아들로 살아왔지만 이젠 새로운 정체성을 지니게 되어 그 일이 의미를 잃습니다.
내가 늑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인간임을 깨달았다면 네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이젠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제 복음전파와 십자가의 길로 투신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참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찾았다면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미와 가치를 알면 그 일이 비록 고되게 보일지라도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넙칩니다.
우리도 우리가 하는 일이 기쁘고 가치 있게 여겨집니까?
그러면 세례를 받으신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 아시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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