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5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요한 1,43-51
“와서 보시오.”
< 안 믿는 사람에게 성당에 한 번 나와 보라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
“예, 저는 마음속으로는 다 믿어요.
어려울 땐 기도도 하고 그래요.
혹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꼭 천주교에 나갈 거예요.”
이 분의 말은 긍정적으로는 들리지만, 사실 현재로서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부정의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절대 혼자서는 가질 수 없고 증가시킬 수도 없습니다.
제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어머니께서 억지로라도 성당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헌금하라고 준 돈으로 오락실에 갔다가 시간을 때우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것이 어머니께 발각되자 다음에는 일찍 가서 주보만 가지고 오락실 가서 시간을 때웠습니다.
그것마저 들켜버리자 하는 수 없이 미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는 친구들도 없었고, 그래서 형과 같이 갔는데 둘이 미사시간에 떠들다가 모든 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신부님께 자랑스럽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우리 둘은 집으로 돌아오며 결심했습니다.
‘다음부턴 절대 성당 나오지 말자.’
그러나 어머니가 주시는 밥을 먹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성당에 다녀가야 했고, 그렇게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하고, 중고등학교 때도 주일미사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대단한 강론을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 자신도 모르게 신앙이 자라났습니다.
대학 시험을 마치고 철야기도회에 어머니 손에 끌려갔을 때 보았던 것들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이 손짓 하나에 주저앉고 하느님 나라의 음악소리를 듣고 저절로 감탄의 소리를 질렀으며 성모님이 선물하시는 꽃향기를 맡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핏덩이를 토하며 병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성령님에 이끌려 일어나서 성경을 히브리어로 말하고 다른 사람은 그 구절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했습니다.
성령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기도회는 그 이후로 어디에서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대학 들어가서는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습니다.
성당에 있는 것이 좋아서 다른 많은 단체에 가입했고, 거의 매일 성당에 와서 살았습니다.
성당에 더 자주 오니 신앙에 관한 더 많은 것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러니 신앙도 나 자신도 모르게 커져갔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한 아이가 떠들기에 미사 중에 불러내서 그냥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사실 많은 기도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진실 되게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머리를 들어보았는데 그 아이가 제 옆에 서서 용서해 달라고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빨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처음이었고, 그 이후로 기도의 힘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무실에서 우연찮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열권짜리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5년 만에 다 읽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제가 되고나니 하느님의 섭리였던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억지로라도 성당에 나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와야 볼 수 있습니다.
봐야 믿을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고 그래서 베틀레헴에서 태어나야 하고, 예루살렘, 혹은 적어도 유다지방에서 나와야합니다.
그런데 필립보가 증언하는 메시아는 갈릴레아 지방의 나자렛 사람입니다.
필립보는 그를 자신의 믿음으로 설득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요한과 안드레아에게 하신 말씀처럼, 그저 “와서 보시오.”라고 초대할 뿐입니다.
필립보는 데리고 오기만 하면 믿음은 예수님께서 책임지실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나타나엘은 그 분을 직접 눈으로 보기위해 필립보를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타나엘을 보시며 이렇게 외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어떻게 아시느냐고 묻습니다.
안다는 말은 이미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관심이 없다면 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역시 예수님께서도 그를 알기 위해 그를 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과 ‘머무른다’는 것, 또 ‘안다’는 것과 ‘와서 본다’는 것이 요한복음에서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타나엘은 이미 자신을 보아서 아시고, 그래서 그 마음 안에 기억하고 사랑하시는 분이 메시아가 아닐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말을 듣고도 예수님을 직접 보기 위해 길을 나서지 않았다면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어, 나타나엘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보아가며 커지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와서 보지 않으면 신앙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오기 위한 노력만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보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이며 또 믿는 이들에겐 그 신앙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며 초대하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분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오기만 하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