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복음 : 루카 1,39-45
< 타인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사람이 되려면 >
이무석 교수의 책에서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한 여자의 사연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첫 째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다가 동생이 태어나자 부모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듦을 느꼈습니다.
동생은 눈에 쌍꺼풀이 있고 자신이 없었기에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작은 눈 때문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버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술집 여자와 부정한 관계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도 자신이 훨씬 많이 벌고 세상에서도 자신이 훨씬 성공한 사람인데 자신과 같은 사람과 살면서 어떻게 그런 데를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은 사과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겉으로는 남편을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론 용서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퇴근한 남편에게 집을 나설 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를 한 시간 단위로 끊어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속이는 것일 수 있으니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똑같이 반복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의심을 하고 있다면 이는 남편을 용서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가 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녀의 문제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생긴 눈 작은 콤플렉스였습니다.
그녀가 남편이 갔다던 술집의 여자를 꿈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이 굉장히 컸습니다.
이는 남편이 그런 여자를 가까이 한 이유가 자신이 눈이 작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상처가 결혼생활까지 영향을 주게 되어, 남편이 아버지의 사랑을 채워지기를 바랐지만 남편은 그것을 견디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을 믿지 못하면 누구도 믿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자매는 사랑받지 못한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상처는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나의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하지만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니 땅에 떨어진 자존감을 공부나 돈으로 다시 높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 알아달라는 그런 여자에게 지쳐갈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내가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 있는 사람임을 믿어야합니다.
물론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그 부족했던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사람일 때는 매우 곤란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다 그런 상처로 자신을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하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다가는 더 큰 상처만 받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해 주실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분은, 당신 자신이 ‘사랑 자체’라고 하신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제물로 죽여 바치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의 모든 상처는 치유되고 다시 기쁨에 차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은 발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전달해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발을 빌려 알려주셔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발이 되어주셨던 분이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 사랑을 당신 태중에 품고 엘리사벳에게로 달라갔습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 당신을 찾아준 것에 대해 태중의 아들과 함께 기뻐 뜁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된 엘리사벳은 이제 태중의 아들 요한도 그런 존재라고 믿도록 키울 것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세상 것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려하는 행위는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요한이 광야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어머니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셔서 행복한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를 위해 주실 수 있음을 믿는 사람만이 또 누군가에게 그 사랑을 전해줄 사랑의 발, 사랑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누구의 자존감도 높여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의 태중에 하느님이 계신만큼 나는 귀중한 존재라는 그 믿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의 죄를 기억하지 마소서.”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무슨 죄 말이냐? 난 다 잊었는데. 네가 기억을 되살려 주려무나.”
우리도 고해성사를 보고 찜찜하여 같은 죄를 또 고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니 그만큼밖에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일을 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 고해성사 본 죄를 계속 기억하고 계시리라고 믿는 것은 하느님을 나의 기준으로밖에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람밖에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셔서 나를 하느님으로 만들어주셨다는 그 믿음, 그것만이 내가 또 다른 사랑의 발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누구의 애정을 갈구하겠습니까?
그런 자존감을 가진 사람만이 오늘 성모 마리아처럼 또 다른 이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시켜 줄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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