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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2-20 조회수 : 405

12월 20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복음: 루카 1,26-38
 
< 성모님처럼 절실하게 갈망하라 >
 
한국 애니매이션으로 한국에서보다는 미국과 세계 전역에서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던 ‘넛잡(The Nut Job); 땅콩 도둑들’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외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1억 3천만 달러라고 하니 대박이 난 영화입니다.
 
공원에 사는 조금은 아웃사이더인 설리라는 남자 다람쥐가 있습니다.
그가 공원에 사는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 먹을 것을 구하려다 겨울을 나기 위해 마련해 두었던 아주 조금의 식량마저 다 날려버리게 됩니다.
 
공원 동물들의 통솔자 라쿤은 공원식구들의 만장일치로 설리를 추방하여 도시로 쫓아 보냅니다.
도시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던 설리는 땅콩을 파는 가게를 발견하지만 그 안에는 무서운 개가 있고 들어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통해 엄청난 양의 땅콩을 빼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공원 동물들의 통솔자 라쿤은 먹을 것이 풍부해지면 공원 동물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자신 편의 동물들을 시켜서 이 계획이 실패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설리 다람쥐는 그 방해를 이겨내고 땅콩 부대들을 빼내어 굶어 죽어가는 공원 동물들을 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게 되면 바뀌는 것이 무엇일까요?
땅 속에 보물이 묻혀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그 보물을 차지하려 할 것입니다.
 
좀도둑들도 무언가 하나 훔치기 위해 며칠 동안 그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거기에 누가 사는지 사람들이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빠져나와야 할지 등을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작업을 벌인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원하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하는 등의 에너지를 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을 당신 안에 받아들였던 성모님의 모범이 나옵니다.
곧 며칠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게 하기 위해 오늘 복음만큼 완전한 모범을 보여주는 복음은 없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오시겠다는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한 질문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믿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여인 중에 복되신 분’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의 한 이 말들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지니고 가브리엘 천사에게 물어보신 위의 질문은
천사의 말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기에 그 방법을 물어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동정을 지켜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모님에게만 하느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성모님만이 천사를 처음 만나는 그런 상황에서 침착하게‘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볼 수 있는 적극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땅콩을 훔치기 위해서도 ‘어떻게’ 훔쳐야 하는지 계획을 세운다면,하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도 ‘어떤 일’을 준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고 하는 것이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한 그런 구체적인 노력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는 하느님나라를 원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을 원하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예화 중 이런 것이 나옵니다.
 
제자가 스승한테 매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나요?”
 
그리고는 매일 똑같이 신비스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갈망함으로써.”
 
“그렇지만 저는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분을 못 찾지요?”
 
하루는 스승이 그 제자와 함께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물속 깊숙이 밀어 넣고서 그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 풀려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 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제자는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 와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다음 날 스승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어제, 자네 머리를 물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바로 그걸세. 그렇게 하느님을 숨 막히도록 간절하게 찾는다면반드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걸세.”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이유는자신이 원하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을 위해서 전 재산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을 위해 잠자는 것도 포기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수녀가 되어 도시의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 교사로 20년을 재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텅 비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중 한 여인의 비명소리를 듣습니다.
그녀는 위독한 환자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첫 번째 병원에서는 돈 없는 환자의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고, 두 번째 병원에서는 신분이 낮은 사람은 치료해 줄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문전박대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그 여인은 이 수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 수녀는 조금씩 차가워지는 여인을 가슴에 품고 이렇게 결심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서 있을 곳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곁이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아침 일어날 때부터 밤잠자리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누구도 흩트려 놓을 수 없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분이 마더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이분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고
그 가치를 아니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것을 얻으려 하다가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에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당신 보물을 내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가치도 모르고 그래서 그것을 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무언가를 주려고 하실 때 그것을 절실하게 원하는지를 보십니다.
절실하게 원하면 적극적으로 그 얻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에 옮기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것도 절실함입니다.
신앙을 가진지 꽤나 지났는데도 겨우 주일미사에만 간신히 나오고 있다면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고 있는 신앙인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최소한만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느님은 당신의 보물을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그분을 절실하게 원합니까?
그래야만 우리 안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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