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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2-16 조회수 : 385

12월 16일 [대림 제3주일] 
 
복음 : 루카 3,10-18

< 언젠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될 당신을 위하여 > 

인간은 완성된 존재일까요, 완성되어 가는 존재일까요? 
마치 풀무 불에 달궈진 시뻘건 쇠처럼 인간은 무언가로 만들어져갑니다.  
 
특별히 아이 때는 부모가 원하는 대로 되어갑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자신의 뜻대로 되어가려합니다. 
그리고 그런 방향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변하기 어려운 형태로 굳어져갑니다. 
 
어떤 사람이 그릇 빚는 노인의 숙달된 솜씨와 작업대 위에 얹혀있는 갓 빚은 옹기들에 대하여 감탄하면서 감상했습니다. 
모두가 근사하고 멋있는 모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옹기장이의 그 모든 수고가 헛되이 끝나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옹기들이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일부 그릇들이 금이 가고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왜 어떤 것들은 금이 가고 깨어지는지 알기 위해 옹기장이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습니다. 
 
“같은 흙을 사용하면서 당신이 어느 것은 잘 빚고 어느 것은 못 빚었습니까? 
아니면 어느 것에다가는 더 수고를 기울이고, 어느 것에는 수고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릇 만드는 과정에서 어느 것에는 어떤 재료가 부족했습니까?”
옹기장이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옹기가 손상되는 이유는 그 그릇들이 불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옹기는 빚어지는 과정과 구워지는 두 과정을 거쳐야하기 때문에 구워지는 과정을 온전히 거치기 위해서는 빚어지는 과정이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재료와 모양, 정성이 완전해야만 구워지는 과정을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 태어남은 ‘물의 세례’와 ‘불의 세례’를 모두 받아야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의 세례는 세례자 요한이 주던 세례인데 그 방향과 모양을 잡는 시간이고, 불의 세례는 그 잡혀진 모양이 불로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마치 물렁물렁했던 진흙을 물레로 돌려가며 어떤 도자기를 만들 때가 물의 세례이고, 그 모양을 잡기가 쉽지만 일단 구워지고 나면 그 모양을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과 같이 되는 것이 불의 세례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것을 굽는 도자기공이 있을 수 없듯이, 물의 세례를 온전히 받지 않은 사람에겐 불의 세례가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불만 내려오라고 청하기보다는 내가 온전한 모습으로 만들어져가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주시기 전에 보낸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의 세례를 주기 때문에 불의 세례를 준비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시키는 것은 감사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방향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모양을 설정해주는 것입니다. 
이를 ‘회개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회개의 세례를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라고 권합니다. 
그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라는 사랑실천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 사람이 앞으로 빚어질 모양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모양이 나올 수 없습니다.

물의 세례는 물론 잘 안되더라도 억지로 선행을 실천하게 만듭니다. 
마치 아기들이 잘 안되지만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면 언젠가는 불의 세례를 통해 완전한 힘을 얻어 이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것이 더 어려운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남입니다. 
 
불의 세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강림을 통해 성령을 받아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어 뛰쳐나갔던 단계입니다. 
그 전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복음을 억지로라도 전하는 것을 배워야했는데 그 전의 단계가 물의 세례를 받는 단계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원하지 않는 사람을 당신 맘대로 빚으시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려는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지 사탄이 되려는 사람에게 성령의 불을 부어주실 수는 없으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남의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딱딱해지기 전에 빨리 나의 방향을 사랑의 하느님을 닮은 쪽으로 틀어야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르치는 대로 일상에서부터 작은 것에 만족하고 나누는 습관을 들이도록 합시다. 
이것에 물의 세례가 요구하는 단계입니다.  
 
레베카는 자신을 찾아온 아브라함의 하인에게 물을 떠 주고 낙타 10마리도 물을 주어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미리 선행을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더 큰 은총을 주실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하인은 자신과 자신의 낙타에게 여자의 몸임에도 최선을 다해 선행을 하는 모습을 보고 아브라함이 맡긴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다 줍니다. 
선행을 베풂이 몸에 밴 것이 물의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이고, 그것을 본 하인이 주인의 모든 선물을 베푸는 것이 불의 세례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은 선물을 준 사람의 집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행이 싫더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는 사랑의 모습으로 빚어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엔 힘들겠지만, 이 마중물의 시간이 지나면 물이 저절로 철철 넘쳐흐를 것입니다. 
그래서 선행에 지쳐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나 행위로 시작되기는 합니다. 
그 행위가 참 은총을 부르는 것입니다.
 
다만 그 행위를 자아를 키우려는 목적으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더 큰 은총을 받아 자연스럽게 더 큰 선행을 하기 위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식당에서 장사 할 때 싼 것을 먹는 손님에게도 간 쓸개 다 빼놓고 충실할 때, 그 사람이 더 큰 손님을 불러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사랑의 실천들이 모여 사랑 자체이신 분의 성령의 불을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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