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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2-15 조회수 : 392

12월 15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복음 : 마태오 17,10-13

< 현대의 엘리야들 > 

2016년 루터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개신교 청년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며 교회를 향한 30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개신교의 문제만이 아닐듯하여 그 중에서 몇 마디만 인용해보겠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특정 성직자 혹은 목회자들의 개인소유물이 아닙니다. ...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이 심각합니다. 
금권선거는 물론이거니와 절차를 무시한 여러 편법들이 난무합니다. ...  
 
한국교회의 재정은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교인들의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여러 불투명한 방식으로 소위 ‘재량 것’ 사용, 즉 남용하고 있습니다. ...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철저히 구분합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이 곧, 신앙생활이며, 예수의 제자 됨을 훈련하는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삶과 신앙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
​      
현재에도 기복신앙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생활을 통해서, 일방적인 성공지향적인 복(福)개념을 강요하고, 개인 신앙에 몰두하게 하고, 개교회(개체교회)의 신앙생활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회적 성공이 개인 신앙의 열매로만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 
     
오늘날 강단에서의 말씀선포에는 시대적 메시지가 상실되어 있습니다. 
알맹이 없는 설교에다가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는 긴 설교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흥미를 떨어뜨립니다. ... 
     
꾸준한 성경공부와 성경연구를 하지 않는 강단에서의 권위주의, 특별히 능력 없는 권위주의에 반대합니다. ...
​     
일부 교회목회자들의 사치와 탐욕은 도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고급 자가용은 물론이고, 서민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소비, 해외여행, 취미 심지어 연봉 그리고 퇴직금까지 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고 있습니다.”

루터가 잘 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당시 가톨릭교회가 지금 개신교 청년들이 부르짖는 이와 같은 모습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는 개신교 청년들이지만 조심스럽게나마 그들이 오늘 복음말씀처럼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파견된 엘리야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을 만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 예언자를 합치면 850명이었지만 하느님의 예언자는 엘리야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우상을 섬기도록 하는 예언자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멜 산에서 그들과 시합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재단에 바친 재물을 사르는 시합이었습니다.  
 
우상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지 못했지만 엘리야는 내리게 했습니다. 
참 하느님이 누구인지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엘리야가 없었다면 마지막까지 참 하느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죽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세상의 영화를 섬기는 이들과 대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참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은 하느님을 볼 눈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선포하러 오시는데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돈에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다고 그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줄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가 필요했습니다. 
그 역할을 한 인물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역할은 세상의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광야로 이끌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돈에 집착한 이들은 나눔의 실천으로, 쾌락에 집착한 이들은 절제로, 시기와 질투, 미움 등에 사로잡힌 이들은 용서와 겸손으로 이끄는 것이 요한의 역할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엘리야는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도시의 쾌락을 좋아했고,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재물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비웃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말부터 무시하고 폭행을 가했습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먼저 끊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는 엘리야와 같은 인물을 거부하였으니 그가 만나게 해 줄 메시야도 거부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대의 엘리야는 그리스도께서 당신께 오도록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주라고 파견하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먼저 믿고 마음을 바로잡으려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을 알아 뵈옵고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교회를 먼저 믿지 못하면 예수님도 모실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먼저 믿지 못하면 성경을 해석해도 오류에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기로 예정된 엘리야가 요한임을 알아보지 못했듯, 수많은 사람들이 성변화 한 빵과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는 엘리야적, 혹은 세례자 요한적 역할이 매우 감소된 것처럼 보입니다.  
 
강의하면서 신자들보고 “돈이 더 좋아요, 예수님이 더 좋아요?”,  “가난한 게 행복한 건가요, 부자가 더 행복한 건가요?” 라고 물으면 이 단순한 질문에도 거의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성당 다니면 세상에서 더 잘 살 게 될 것이라는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렇게 된 책임은 현재 교회에도 있습니다.
자아와 그것이 일으키는 세 욕망(三仇)과 싸워 이겨야만 주님을 모실 수 있음을 온전히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돈에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엘리야 역할,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온전히 하지 못하게 될 때, 세상은 점점 바알과 아세라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혹은 메시아가 탄생하기 이전의 어둠의 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점점 더 세속의 유혹이 강력해져가는 이때에, 점점 더 새로운 엘리야들이 많이 나와야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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