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복음 : 마태오 4,18-22
< 애정을 가로막는 사랑의 바리케이드 >
오늘은 ‘엑스(X)’ 모양의 십자가에 순교한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살아있는 며칠 동안에도 계속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이탈리아 아말피라는 아름다운 해변 마을에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습니다.
그래야 누군가 그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 10,13)라고 말하며 이 구원을 위한 파견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하지만 ‘파견’된다는 말 안에는 또 누군가와의 이별을 전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처럼 주님의 파견을 받는 사도들은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라는 말씀대로 자신의 꿈과 애정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모와 형제,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버림이 결국은 참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버리지 못하여 주님의 뜻을 져버리면 그 애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보좌 때에 어머니가 성당에 너무 자주 오셔서 오시지 말라고 하여 눈물을 흘리게 해 드린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때문에 제가 사제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원망을 받는 것보다 그때 그렇게 한 것이 지금도 잘 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바리케이드를 반드시 지니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사람들과 더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도구임도 잘 압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이 방어벽이 무너질 때 하느님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맺으려고 하던 관계도 무너집니다.
사랑하는 두 자녀에게 이 바리케이드를 쳐야만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비장이 부풀어 방에만 누워있어야 했던 신앙인이자 의사,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그는 그의 책 ‘사랑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에서 자녀들을 안을 수 없고, 자녀들이 그를 안지 못하게 만드는 방어벽을 치며 살아야했던 사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는 의사로서 방사능을 연구하고 있었고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방사능을 많이 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업무 과중으로 백혈병에 걸려 길어야 3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지요.”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져 다카시는 자신보다 먼저 간 아내의 검게 타 버린 뼈를 양동이로 주워 모아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다행히 할머니 댁에 가 있어서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방사선 연구가인 다카시는 자신이 직접 아내가 죽은 자리에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방사능이 금방 사라진다는 것을 증명해내려 했습니다.
다카시는 방사능에 노출된 곳에 살려면 적어도 75년이 걸린다는 연구결과를 뒤엎고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나가사키를 재건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자녀와 함께 작은 단칸방에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몸은 뼈만 남은 데다 배는 만삭인 여인처럼 불러있었습니다.
비장이 부풀어있었기 때문이고 그 비장은 작은 충격에도 터질 수 있어 아이들의 접근을 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그 한 평 남짓한 방에서 아빠 냄새를 맡으며 “아... 아빠 냄새...”라고 좋아합니다.
엄마 냄새도 못 맡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다카시는 그들과 더 오래 있을 수 있는 길은 그들이 자신을 안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알기에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자신에게 넘어지지 않도록 책과 약병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불 속의 아빠 냄새만 맡고 아빠가 잠들어있을 때는 몰래 바리케이드를 넘어와 얼굴을 대고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빠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아이의 촉감을 더 느끼고 싶으면서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심경을 다카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비장이 터진들 그게 무슨 대수랴. 이 아이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내게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기뻐해 준다면 ...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한 달이라도,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아서 이 아이가 고아가 되는 시간을 줄여야만 한다.
1분, 1초라도 죽을 때를 늦춰서 이 아이가 견뎌야 할 외로운 시간을 최대한 줄여주어야만 한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칭찬받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이렇게 애정까지도 끊을 수 있는 희생 때문입니다.
그 덕에 하느님의 눈에도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당신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이렇게 보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우리는 나가이 다카시처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나를 찾아올 ‘죽음’ 역시 한없는 사랑이신 신이 내게 내리는 최대의 사랑의 선물이리라.
그러므로 죽음 전에 겪어야 하는 마음의 고뇌도 몸의 고통도 신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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