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 : 루카 19,41-44
< 외적인 눈과 내적인 눈의 양자택일 >
저희 어머니는 무릎이 좋지 않으십니다.
얼마 전에 인공관절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사시는 빌라는 4층입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어머니가 4층까지 올라가시는데 하루 종일 걸립니다.
낮은 층으로 이사 갔으면 좋겠다고는 하시지만 집에 대한 애착이 있으셔서 말만 그렇게 하시고는 이사를 하시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당 바로 밑이 집이기 때문에 성당과 좀 떨어진 아파트로 이사하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아주 무리가 가지 않는 한 그 집을 고집하실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어머니는 편안함보다는 마음의 평안함을 더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를 차지하려면 하나는 희생시켜야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지나치게 편안해지면 마음의 평안함을 잃게 돼 있습니다.
며칠 동안 누워 TV만 보고 있다면 마음이 편할까요?
오히려 불안해질 것입니다.
아이들이 PC방에서 밤새 컴퓨터 게임만 하면 마음이 좋을까요?
자신이 그런 존재밖에 안된다는 자괴감에 빠져 매우 불안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매우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함이 아니라 육체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불안과 걱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오늘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예루살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눈먼 예루살렘은 이제 참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라고 예고 되었듯이 완전히 허물어져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예수님께서 그 도시를 지켜주셔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세속적인 힘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 속에 로마 군대에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불로초를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전 세계로 불로초를 찾으러 보냈지만 결국 단명하고 말았던 진시황제처럼 많은 이들이 삶을 연장해보려다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하시듯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평화를 알아보지 못하고 순간적인 편안함을 추구하여 영원한 평화를 잃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볼 수 있는 눈을 멀게 만드는 것은 육체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육체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꾸어야합니다.
육체적인 눈은 속기 쉽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며 살아간다면 정작 중요한 영적인 선물을 다 놓치고 맙니다.
성체를 밀떡으로만 바라본다면 그 사람에게 구원은 어렵습니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에 보면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처럼 행동하는 많은 예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레몬 향을 맡으면 갑자기 청결에 신경을 쓰게 된다고 합니다.
세척제에 주로 레몬 향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몬차를 마시던 엄마가 갑자기 걸레를 찾아 청소를 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왜 갑자기 청소를 하느냐고 물으면 엄마는 “저녁에 오시는 손님이 먼지 알레르기가 있으시대. 너희 엄마가 이렇게 현명한 사람이야.”라고 말합니다.
레몬 향과 청소가 무의식중에 연결되어 그런 욕구가 발동한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나서 그런 결정을 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내가 살기 위해 심장을 뛰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맞선을 본지 3초 만에 그 사람의 눈 깜빡임이라든지 체취 등이 싫어 ‘왠지 아니다, 이사람!’이라고 결정해 놓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 담배를 피워서 싫어!”라고 말합니다.
왜 싫은지 본인이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말에 남자가 속아서는 안 됩니다.
겉이 아닌 속뜻을 보아야합니다.
설사 몇 달 뒤에 그 사람이 담배를 끊고 돌아온다고 그 여자의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남자들은 “여자의 속은 알 수가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남자가 들은 말만 전부라고 여기는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여자도 자신이 왜 싫은지 모를 수 있어서 한 말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보면 내적인 눈을 잃습니다.
외적인 만족을 추구하면 내적으로는 불만족해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외적인 편안함을 조금 불편함으로 바꾸러 오셨습니다.
그래야 내적인 평화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시멜로우 실험에서 진정 마음의 평화를 얻는 아이들은 마시멜로우를 보며 15분간 참아낸 아이들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마시멜로우의 맛을 느끼기 위해 참아내지 못한 아이들은 그 순간의 기쁨 때문에 오랜 마음의 평화를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라나서도 잘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참 평화는 외적인 불편함을 참아낼 수 있을 때 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조금 불편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다고 그분을 거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처럼 망하게 됩니다.
평안함을 위해 편안함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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