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제1독서 : 열왕기 상권 17,10-16
제2독서 : 히브리 9,24-28
복음 : 마르코 12,38-44
< 봉헌의 보상, 함께 머무심 >
공민왕 때에 의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가 함께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웠습니다.
그리고 그 한 덩이를 형에게 주었습니다.
양천강(陽川江)에 이르러 같이 배를 타고 건너다가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에 던지니, 형이 괴이하게 생각하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나는 평소 형을 사랑함이 심히 돈독하였는데 이제 금을 나누고 보니 문득 형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므로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이를 강에 던져 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형이 “너의 말이 진실로 옳다.”하고 말하며 역시 금을 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재물을 좋아하는 마음으로는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습니다.
상대를 자신의 재물을 불리는 도구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재물에 대한 욕구만이 아닌 세상 것에 대한 어떠한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도구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봉헌’이라는 제도를 마련하셔서 세상 모든 것들은 관계를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이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 때부터 당신이 주신 것 가운데 일부를 다시 당신께 바치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서 재물에 대한 욕심을 줄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봉헌되어졌어야 할 선악과까지 인간이 차지하게 됨으로써 하느님은 그들의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머무실 수가 없게 되셨습니다.
이에 주님은 카인과 아벨의 사례는 물론이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외아들을 당신께 봉헌하라 하심으로써 끊임없이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세상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멜키체덱에게 축복을 청하며 자신 소유의 1/10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재개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소유의 1/10을 선악과에 비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십일조는 그저 구약의 법이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더 이상 그런 봉헌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신앙의 표시를 에덴동산에서부터 배우게 하셨고 아벨의 제사를 거쳐 아브라함을 통해 일깨워주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 훨씬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고 모세 때 율법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 십분의 일을 봉헌하는 것은 율법이 아닌 보다 훨씬 근원적인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위한 절대적 요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바쳤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생활비 모두를 바치는 신앙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담으로 말하자면 에덴동산에 있었던 모든 과실나무들을 봉헌한 셈이고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것과 맞먹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봉헌을 통해 축복을 얻었는데,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침으로써 어떤 축복을 얻게 될까요?
돈을 많이 벌게 될까요? 오래 살게 될까요? 자손이 잘 될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남겨졌던 하느님의 가장 큰 축복은 ‘그들과 함께 계셔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 과연 아버지가 사 오시는 선물이나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맛있는 밥상일까요?
아이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존재자체가 자녀에겐 더없는 축복입니다.
아무리 그런 것들이 잘 제공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부모 없이 살며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봉헌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가 자신을 얼마나 믿고 의탁하는지에 대한 척도가 됩니다.
아이가 자신의 용돈을 모두 다 부모에게 맡기면 부모는 그 작은 것을 받고 자녀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작은 용돈으로 부모 몰래 무언가 하려고 한다면 부모는 아무래도 신경을 덜 쓰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도움이 더 필요한 자녀에게 더 머물려고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불쌍한 이에게 가장 시선이 많이 갈 것이 뻔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생활비까지 다 봉헌한 과부에게 사로잡혀 계십니다.
그녀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실 기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당장 먹을 것도 없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봉헌할 줄 아는 사람에게 오는 축복은 주님께서 함께 계셔주심인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서 히피문화가 급속도로 퍼졌다고 합니다.
수많은 친구들이 전쟁 통에 목숨을 잃고 자신들만 살아남은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큰 정신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집을 나와 머리를 기르고 길거리 생활을 하며 기타를 치면서 참 삶의 의미를 찾으려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교회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는 옷과 머리를 단정하게 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어떤 교회는 그들을 따듯이 맞아주었습니다.
물론 젊은이들은 자신들에게 단정한 옷차림을 강요하는 교회를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히피를 받아들은 교회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찬송가로 충만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히피문화가 시들고 젊은이들은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미국의 큰 기둥들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교회들은 노인들만이 남아있었고 그들을 받아들였던 교회는 주요 미국 인사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둘이나 셋이 함께 모인 곳에는 당신도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둘이나 셋이 모이는 것은 혼자 있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와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상대를 위한 ‘배려’의 정신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위한 배려가 상대가 나에게 머물게 만드는 ‘봉헌’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참아주는 것이 봉헌입니다.
그래야 둘이 함께 머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관계를 위해 자신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면 당연히 당신께도 봉헌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 당신께서 함께 머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봉헌의 보상은 그분께서 함께 머무심이고 그분께서 함께 머무시면 그 공동체는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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