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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1-05 조회수 : 375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독서 : 필리피 2,1-4
복음 : 루카 14,12-14

< 무조건적인 사랑의 엄청난 보상 >
  
선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궁전이 있었습니다. 
한 소녀가 궁전에 들어가고 싶어 매일 몸을 단장했으나 궁전의 열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궁전의 문지기가 소녀에게 귀띔해 주었습니다.
     
“남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사람에게 열쇠가 주어진단다.”
소녀는 그날 늙은 거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궁전으로 달려가 열쇠를 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열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낙심해 힘없이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강아지 한 마리가 덫에 걸려 신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소녀는 정성을 다해 강아지를 풀어주었습니다.
소녀의 손과 발에서는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
     
그때 궁전의 문지기가 나타나 열쇠를 주었습니다. 
소녀가 놀라며 말했습니다.
     
“저는 열쇠를 얻기 위해 강아지를 구해준 것이 아닌데요.”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실천한 거지.”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세 부류로 나뉠 수 있겠습니다. 
한 부류는 베짱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데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챙깁니다. 
아직 사회생활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벌어서 자기가 쓰는 개미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계산적입니다.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해도 되갚음을 받을 수 있을 때, 혹은 이런 사실이 알려져서 칭찬을 받을 수 있을 때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꿀벌과 같은데 그냥 자신이 좋아서 꿀을 먹고 다니는데 그런 행동이 암수의 수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물들에게 열매를 맺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이 됩니다.  
 
꿀벌들은 세상에 열리는 수많은 열매들이 자신들의 역할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행위로 어떠한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들이 하는 모든 행위가 선행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람은 이 세 부류 중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꿀벌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베푸는 그 사랑만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갚을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타인에게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접대 같은 행위를 해 본 사람을 알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지를 말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상대가 갚을 수 없어도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약 상대가 갚기를 바라는 것만 한다면 아이를 위해 어머니가 목숨을 바치는 것과 같은 행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목숨을 잃으면 보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보상이 나중에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의인의 보상은 부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의인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기 때문에 자신 안에 하느님을 모신 사람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사랑을 행하실 때는 우리는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보상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 자체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지만 그 사람 안엔 영원한 생명이 자라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그 자체로 보상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만 주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만 부활의 주님을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즈니시의 ‘행복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부자가 친구에게 “사람들은 내가 죽을 때 전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미리 유언한 것을 알면서 왜 나를 수전노라고 비난하는지 모르겠어.”라고 토로합니다.
     
그러자 친구가 ‘돼지와 암소이야기’를 해 줍니다.
“돼지가 암소에게 불평했지. 
‘나는 사람들에게 베이컨과 햄, 심지어 발과 털까지도 제공해.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고 너만 칭찬해.’ 
암소가 말했지. 
‘그건 나는 살아 있을 때도 유익한 것을 제공하기 때문일 거야.’
    
재산을 나중에 기부한다는 것도 엄청난 선행이기는 하지만 그런 기부천사의 이름을 목에 걸고 평생을 칭찬을 들으며 살 수 있어서 어쩌면 이것도 완전한 선행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있다면 지금 당장 굶어 죽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눔을 통해 지금 당장 가난해지려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게 가난해지더라도 지금 당장 행복해야 참으로 사랑이 그 안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행복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은 하느님을 품게 만들기에 사랑 자체가 보상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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