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복음 : 루카 11,29-32
< 표징이 표징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 >
‘사실 인간성에 문제가 있었던 역사적 위인 5명’이란 제목의 유튜브 인기 동영상에 마더 데라사 수녀님이 끼어있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분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주된 이유는 ‘빈곤의 고통이 아름답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노벨상을 수상하고 가톨릭교회에서 성녀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그분의 단점이 가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시설 내에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취급하는 방법이 좋지 않았다고 동영상은 소개합니다.
실제로 그곳에서 활동했던 봉사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문지식이 부족했던 스태프들, 그리고 한번 사용한 주사기의 반복적 사용, 사용 기한이 지난 약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들에게 시중에서 판매되는 해열제와 진통제를 먹이는 부적절한 치료도 이루어졌고 시설에 있는 환자들이 가족들과 면회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금액이 전 세계 각국에서 기부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설에 있던 사람들에게 적절한 처우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자금의 부족이 아니라 데레사 수녀님의 의도였는데 그 증거가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던 사람들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말하며 빈곤 자체를 미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란 주장입니다.
이렇듯 동영상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거의 정신병자로 몰고 있고 댓글을 보니 수녀님을 옹호하는 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분이 빈곤의 고통이 아름답다고 말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아름답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가난의 상징입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처참하면서도 우리 구원의 원천이기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아름답게 보지 못하여 도와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이지, 그들을 형제처럼 아름답게 대하는 것을 그들이 계속 고통 받기를 원했다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억측일 뿐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자서전에 보면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은 굶어야 했던 상황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더운 곳에서도 그녀는 가구 하나 없는 아주 작은 방에서 낡아빠진 선풍기 하나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마치 세계에서 쏟아지는 돈을 유용이라도 했다는 듯이,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주신 분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 안에서 자신을 변하게 만들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 때문에 변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고 그 이유로 자꾸 다른 표징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표징입니다.
표징이 되려면 자신 안에서 하느님과 이웃이 만나게 해야 합니다.
표징이라면 성막이나 성전을 생각하면 됩니다.
성전은 하나의 표징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을 모시면 사제가 들어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모든 성전은 표징이 됩니다.
그리고 그 성전 안에 들어오기 합당한 사람이라면 그 표징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 변화되는 것입니다.
가장 완전한 성전이요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도 군중은 계속 다른 표징을 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완전한 표징을 두고도 다른 표징을 요구한다는 말은 마음이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싶지 않게 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표징이라면 요나를 닮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표징이 되기 위해 물고기 속에서 사흘 밤낮을 견뎠습니다.
이는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죽지 않는 누구도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참 표징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요나처럼 땅 속에서 사흘을 계셨습니다.
누구든 표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나무라십니다.
요나의 예언 때문에 니네베의 모든 이가 회개하였고,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멀리 남방에서 여왕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였는데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 계심에도 그분께 다가오려 하지 않는 것은 ‘변하고 싶은 의지’가 없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를 보고 자신도 불쌍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면 됐지, 굳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찾아내어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그분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예수님도 거부하고 그분의 십자가도 거부합니다.
자신이 표징을 받아들이면 자신도 그 표징의 표징이 되어야하는데 그러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죽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표징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가 그런 사람이고 그분이 파견하신 교회를 거부하는 이가 그런 사람이며 성체성혈을 거부하는 이가 또한 그런 사람입니다.
요나처럼 나를 물고기 속에도 묻을 수 있는 마음을 청합시다.
도망 다니는 삶보다 표징이 되는 삶이 훨씬 행복합니다.
표징은 내가 변하기를 원할 때만 표징으로 보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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