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0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루카 7,36-50
< 내 안에 숨겨진 죄 >
평화방송에서 방영된 강의 중, 대구교구에서 행려자들과 함께 농사지으시며 생활하시는 최영배 신부님의 ‘그와 나’ 강의 중 두 번째 것에 ‘용서’에 대한 내용이 좋아서 여기에 간단히 간추려봅니다.
신부님께 어떤 자매님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천사처럼 사는 분이라 성당에서도 천사란 별명을 지닌 분이신데, 요즘에 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10년 전 자신의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그것을 떼어먹고 미국으로 도망쳤던 사람을 10년 만에 길가에서 보고는 온 몸이 마비되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죽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자신은 천사라 다 용서하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치니 그런 나쁜 마음이 생겨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분에게, “사람 모든 마음에 악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에 가라앉아 있는 오물과 같아서 그 물병이 쓰러지기만 하면 병 안의 모든 물을 더럽힙니다.
자매님이 천사로 불렸던 것은 지금까지 그 오물이 가라앉아있기만 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부님이 신학생 때 직접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당신도 신학교에 늦게 들어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도 도와주는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기도 중 가슴 속에서 수많은 구더기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것들이 당신 안에 잠재되어있던 죄들이었음을 알고는 5년 동안 밤마다 방에서 우셨다고 합니다.
5년이 지난 뒤에야 그것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몸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서품을 받고 첫 미사 때 바로 교도소로 달려가셨습니다.
남자 4백 명, 여자 2백 명이 넘는 복역자들에게 자신도 똑같은 죄인인데 자신은 들키지만 않았을 뿐, 그래서 천사처럼 제의를 입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들켜서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차이밖에는 없는데, 이렇게 고생하고 계신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시며 사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미사는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고 모든 분들이 신부님과 함께 울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교만, 성욕, 욕심이라는 세 가지 죄를 누구나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는 그것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고 누구는 터뜨릴 뿐이지 같은 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남자분이 외도를 하다가 들켜서 간통죄로 6개월을 복역하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용서를 받아주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밭에서 두 분이 함께 일을 하고 있는데 천사처럼 아름답게 꾸민 자매가 잠깐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고 내려오다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는 얼굴이 마귀처럼 변하여 욕을 마구 퍼붓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서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않았는데 이런 창피한 고통을 준다고 빨리 이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님은 교사였는데 어떻게 교사 입에서 그런 말과 표정이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남편은 기가 죽어서 계속 무릎을 꿇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눈에는 그 자매가 마귀처럼 보였고 형제가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같은 죄를 지니고 있는데 그 자매는 좋은 환경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아직 쓰러져보지 않아서 자신 안에 가라앉아있는 악성을 보지 못했을 뿐이고, 형제님은 그 악성을 행동으로 나타내서 자신의 나쁜 면을 보고 뉘우치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상황입니다.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사이는 한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뿌리고 머리로 닦는 등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덜 탕감 받은 사람보다 탕감해준 사람을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그 여인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법칙대로라면 죄를 많이 지어서 더 많은 죄를 탕감 받아야만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뜻이고, 그런 면에서 특별한 죄를 짓지 않은 바리사이인인 시몬은 억울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더 사랑받기 위해서 죄를 많이 지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몬의 마음에도 세상의 죄인으로 질책 받는 그 여인처럼 많은 죄가 가라앉아 있는데 그것을 죄라고 보지 않고 그 위의 맑은 부분만을 자신이라 여기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행위로 나타나는 죄만을 죄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으로 바라만 봐도 간음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억누르고 있는 죄까지도 용서를 받아야 나중에 쓰러질 일이 생겨도 그 오물이 자신을 온통 뒤덮지는 않게 됩니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은 그 밑에 오물이 없는 분들이기 때문에 당신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에게서도 미움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화를 내지 않아도 화가 나면 죄고, 겉으로는 웃어도 미움이 생기면 죄며, 음란한 짓을 하지 않더라도 그런 감정이 솟아오르면 그것이 바로 간음과 같은 죄입니다.
우리 모두는 원죄를 지니고 있고 그 원죄의 찌꺼기들은 여전히 내 안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누가 용서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안에 가라앉아 있는 나의 죄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지은 죄뿐만 아니라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죄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의 피로써 내 행동의 죄뿐만 아니라 내가 감추고 있는 죄까지도 씻어내도록 합시다.
그러려면 내 자신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나도 똑같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잘못하는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을 뿐입니다.
내 안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받도록 합시다.
그러면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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