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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9-14 조회수 : 440

9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복음 : 요한 3,13-17

< 천국에도 고통이 있다 >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왕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뒤를 이을 왕자가 없고 공주만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왕은 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말 타기와 활쏘기였습니다.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이었습니다. 왕은 문제를 냈습니다.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 오너라. 
기간은 100일을 주겠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려면 우선은 키가 커야하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려면 나뭇가지 또한 길어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며 제각기 길을 떠났습니다. 
 
그 20명 중에는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 나무를 구하려다가 찾지 못하고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의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던 페로가 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나무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나무 십자가다!”
그 후 존 페로는 핀란드를 잘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왕은 하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왕이 ‘십자가’의 희생을 알지 못한다면 오히려 하늘의 뜻에 반하여 자신만 배부르게 먹고 마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건 누군가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도 십자가는 존재할 것입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칫 천국을 고통이 없는 세상이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 없는 곳은 천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국도 고통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도 못 박히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당신의 뜻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차피 상대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 뜻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천국에도 있습니다. 
천국에도 아버지는 아드님께 성령을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실 것이고 아드님은 아버지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천국에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끊임없이 못 박아야합니다. 
자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서 꿈틀거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 앞에서 언제나 우리 뜻을 죽이는 고통을 감내해야합니다.  
 
천국에는 자신의 뜻을 십자가에 매달 수 있는 수준의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천국 십자가의 고통이 지옥의 고통과 다른 것은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자아를 죽여 그 피를 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에 대한 영광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지옥은 그 자아를 죽이지 못해 영원히 자아의 종살이하는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여 결국 그분으로부터 오는 부활도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과 지옥의 두 고통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야합니다. 
고통의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다만 육체의 성향을 잘 알기에 운동하는 고통을 달게 받아 건강이라는 영광을 받던가, 아니면 육체에 져서 편안함만 추구하다가 병이라는 고통을 받던 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뿐입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십자가의 고통을 피해가지 못하셨습니다. 
하물며 죄인인 우리들이야 어떻게 이 고통을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떠한 고통이든 겪어야한다면 부활이 있는 고통을 선택하라는 모범을 보여주신 것뿐입니다.  
 
병의 고통을 겪는 것보다 운동의 고통을 겪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훈련을 통해 이승에서부터 천국의 고통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매일매일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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