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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9-13 조회수 : 443

9월13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독서 : 코린토 1서 8,1ㄷ-7.11-13
복음 : 루카 6,27-38

< 미워하면 같은 수준이다 > 

누구를 미워하면 우리의 무의식은 그 사람을 닮아가요. 
마치 며느리가 못된 시어머니 욕하면서도 세월이 지나면 그 시어머니 똑 닮아가듯. 미워하면 그 대상을 마음 안에 넣어두기 때문에 내 마음 안의 그가 곧 내가 됩니다.  
 
그러니 그를 내 마음의 방에 장기 투숙시키지 마시고 빨리 용서한 다음 바로 쫓아내 버리세요.
싫어하는 사람을 내 가슴속에 넣어두고 다닐 만큼 그 사람이 가치가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나를 응원하는 친구만 마음에 넣어두십시오. 
싫어하는 사람 넣어두고 다니면 마음에 병만 얻습니다.

혜민 스님의 말입니다.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생각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을 닮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복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 속에 자주 떠오르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워하면서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닮는다는 것은 같은 수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내가 미워한다고 내가 그 사람보다 높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높은 수준의 사람이 낮은 수준의 사람을 닮지는 않습니다.  
 
어른이 공갈 젖꼭지를 물고 다닌다거나 아이들처럼 칼싸움, 총싸움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같은 수준이거나 더 높은 수준은 닮아갑니다. 
아이가 부모를 닮아갈 수는 있어도, 부모가 아이를 닮으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간다면 그 미워하는 사람은 나와 같은 수준이거나 더 높은 수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수준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게임을 매우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은 아이의 수준일 것입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아이 때 좋아했던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다면 더 이상 나뭇잎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준이 변하면 좋아하는 것도 변하게 됩니다. 
 
만약 좋아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마음이 어떨까요?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가서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상대에 대한 미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이 ‘화’이고 ‘미움’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남은 하고 나는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믿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짜 온 프로젝트를 상사가 가로채서 모든 영광을 받을 때 화가 난다면 나도 그 사람처럼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그 상사와 같은 수준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 상사를 용서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아니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고 하십니다.  
 
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만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느냐면, 그렇게 내 수준을 들어 높이지 않으면 용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을 좋아하는 수준에서 돈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한 것과 같습니다. 
내가 돈에 무심한 수준이 될 때 비로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마치 애벌레끼리는 서로 잎사귀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 간 다른 애벌레를 용서하기 어렵지만, 나비가 된다면 용서가 쉬워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용서하면 이미 수준이 높아졌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아야, 그리고 상대가 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고통인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형은 아우에게 왜 화가 나 있었을까요? 
자신도 술 먹고 돈쓰고 다니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그런 삶이 행복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니 동생이 돌아왔을 때 더 높은 수준에 있던 사람은 동생을 질투하는 형이 아니라 이미 그런 것들에 맛을 잃은 동생인 것입니다.

원수까지 용서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사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안다면 미워하기 보다는 연민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하니 미운 마음이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맛을 완전히 끊은 자유를 느껴보지 못해서 그것에 얽매여 있는 사람까지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 마음이 더 아픈 것을 몰라서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행복하다고 여겨 질투하고 미워하니 자신도 결국 같은 수준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 것엔 흥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내가 관심 없는 것을 가져갔는데 미운 마음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가져가는 사람들까지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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