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1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오 25,1-13
<사랑하다 기쁨을 잃을 때>
사랑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의 불행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믿고 상대를 위해 내 행복까지도 잃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 때 혼자만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애착입니다.
몇 년 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죽은 남편과 7년 동한 동거한 한 여성의 실화가 공개되었습니다.
이것은 방배동 한 빌라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새어나오면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죽은 뒤 무려 7년 동안 집안에 두고 산 사람처럼 대하며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신은 7년 동안 완전히 부패되지 않은 ‘미라’ 상태에 가깝게 보전돼왔습니다.
남편은 앞길이 유망한 환경부 고위공무원(3급. 부이사관)이었고 아내는 약사로 대인관계에 큰 이상이 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는 시신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잠을 잤으며, 시신을 씻긴다고 했습니다.
그 집에는 세 자녀와, 남자의 친누나도 시신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취재 결과 그 남자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남동생이,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부검 결과 시신에서 에탄올이나 포르말린 등 방부 처리한 약품 성분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동료공무원들은 “종교의 힘으로 현대의학을 뛰어넘어보겠다.”고 했다는 진술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성지에서 남편을 위한 생미사를 봉헌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놓아야 할 때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부활할 가능성이 없이 미라가 된 사람들과 사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관계를 끊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자유로운 두 영혼이 하는 것인데 한 사람이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다면 자유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까칠할 때는 까칠해야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까칠함입니다.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이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관계 맺을 준비가 더 잘 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직장 상사가 술 한 잔 하자고 제안하는데 싫다고 단호하게 대답하려면 더 이상 그에게 좋은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말아야합니다.
하지만 그런 까칠함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오는 또 다른 이익을 바라고 관계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싫은데 그런 관계를 맺어야만 해서 억지로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이 그 상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관계 때문에 기쁨을 잃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리옷 유다와 함께 지옥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 현명한 처녀들이 미련한 처녀들에게 자신들의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름을 나눈다고 자신들의 불이 곧 꺼진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것을 꺼뜨릴 위험마저도 감수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은 매정한 듯 보이지만 그 불이 꺼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건강한 까칠함이란 적어도 내 안에 등잔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등잔불이란 성령의 타오름인데, 그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잃어가면서까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누군가를 함께 미워해야 한다면 그 관계를 끊으십시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기쁨과 평화를 잃게 된다면 그런 관계는 끊어야합니다.
그것들을 지킬 수준이며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만나도 됩니다.
이것이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사람의 관계 맺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관계에 먹히고 애정에 먹혀 그것들의 노예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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