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위한 무분별심
문둥병자였던 승찬은 달마 대사의 제자인 혜가 스님을 만나 병도 치유되고 큰 깨달음을 얻어 중국 최고의 문자라 일컬어지는 ‘신심명’을 짓게 됩니다.
그는 병고에 찌든 얼굴과 남루한 옷차림으로 무조건 혜가 스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자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엎드리며 말합니다.
“스님, 저는 지금 이렇게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혜가가 조용히 묻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혜가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승찬은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혜가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 죄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그것을 없애 주마.”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승찬이 다시 말합니다.
“죄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가 빙긋이 웃으며 말합니다.
“그렇다면 네 죄는 다 없어졌다.
찾을 수도 없는 죄에 묶여 헛되이 고통 받는 일은 이제 그만 하라.”
승찬은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병들게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이 깨달음으로 병도 치유되고 은둔생활을 하며 무분별심을 주제로 한 ‘신심명’을 짓게 된 것입니다.
[출처: ‘무분별의 지혜’, 김기태, 판미동, ‘강의에 앞서’]
문둥병은 관계를 위한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장애가 된다고 믿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장애가 됩니다.
사실 분별심을 가진 이들은 관계를 맺을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니 그들을 신경 쓸 것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 분별심 없이 자신을 안아주는 사람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러면 자격지심이란 병이 완전히 치유되고 누구라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을 만날 때 가끔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될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 어색함 사이에는 수많은 나의 생각들이 끼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즐겁게 해 주거나 말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자격지심입니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존재 자체로 상대를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관계가 어색해지는 이유는 둘이 만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 자아와 셋이, 어쩌면 상대의 자아와 넷이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친한 사람은 상대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만나고 있는데 상대가 끼어든 상태라 상대가 어색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떠나야합니다.
자아는 ‘분별심’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주는 양심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양심은 옳고 그름은 알려주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자아입니다.
자아는 죄를 짓게도 만들지만 죄를 지은 자신과 이웃을 심판합니다.
이렇게 자아에게 사로잡힌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일어나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먼저 자신을 심판했으니 자신의 부끄러운 면이 드러날까 걱정인 것이고, 그렇게 상대가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미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방어막을 치고 먼저 상대를 공격하게도 되는데 그런 모습이 상대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관계가 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어야합니다.
자신을 심판하고 상대를 심판했기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색함도 두려움의 일종입니다.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여기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자신을 심판하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은 그런 처지의 여자입니다.
피를 잃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부정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당시 피를 잃고 있는 여인과 스치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처지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런 자격지심을 극복합니다.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는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처럼 자신을 심판할 수많은 사람들이 끼어있었습니다.
그들을 뚫는 방법은 자신에 대한 판단을 멈추는 일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심판하는 것에도 무관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무분별심을 가졌다는 말은 심판자인 자아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아가 계속 죄를 범할 때에는 그런 무분별심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게 만드는 것 자체가 자아이기에 죄를 지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심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비록 죄인이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적어도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예수님께 손을 뻗을 수 있는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면 어느 정도는 자아의 속박에서, 즉 죄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보아야합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광야에서 자신 안의 뱀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입니다.
심판자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곳이 ‘광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그 여자’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은 파라오를 섬겼습니다.
자아를 섬기는 상태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기 위해 먼저 그들을 자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셨던 것입니다.
자아를 상징하는 파라오를 가나안 땅에서는 ‘바알’이라고도 부릅니다.
바알은 우상입니다.
자아를 섬기는 사람이 하느님을 만들면 금송아지가 되는데 그것이 바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자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분별심이 사라졌을 때 자신을 구원해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만나게 됩니다.
신랑은 머리이고 신부는 몸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신부입니다.
그렇게 상대를 진정으로 만나게 되고 상대와 한 몸이 됩니다.
이것이 만남입니다.
주님은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오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과 이웃들의 심판에 무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자비’로 만나 뵙습니다.
자신이 자비로워야 하느님도 자비롭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과 만나도 단 한 명과도 만난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아라는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집 안에서 사람들을 바라본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친교를 맺고 싶다면 분별심을 버려야합니다.
집에서 나와야합니다.
광야에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를 만나 하느님의 성전을 완성한 사람만이
하느님은 물론 이웃도 (하느님이 인간을 만나듯이)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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