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영국에서 ‘아서’라는 여섯 살 난 아이가 친부와 계모에게 아동학대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이의 몸에는 수백 개의 멍이 있었고,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입니다. 아이의 집에는 가정용 CCTV가 있었고, 여기에 아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배고픔에 잠을 이루지 못한 아이는 서럽게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이렇게 외치는 동안 그 어떤 위로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다른 이의 위로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뿐입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분이신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위로도 필요했습니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말은 분명히 필요했습니다. 이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할 때는 하느님의 소리도 잘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모두 비판하고 있을 때, 그래도 위로할 수 있는 ‘나’가 되어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도 없다며 절망에 빠지고 그 결과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더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을 향해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위로하기 위해 우리도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눈높이를 맞춰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이렇게 높이를 맞출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을 뽑아서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보내십니다. 단순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일까요? 그것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게 하십니다. 왜일까요? 시선을 맞춰서 진정한 위로를 하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맞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루카 복음사가 역시 이렇게 세상에 위로를 주기 위해 온 힘을 전한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림자라고 불릴 정도로 함께하였고, 또 전교 활동을 하며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위로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위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해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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