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을 다 팔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참으로 부자가 되려면 신앙의 선물을 통하여 부르시는 영광 안에서 추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솔로몬은 지혜를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도 낫게 여기고 주님께 그것을 청한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지혜 7,8.11).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지혜 7,7).
오늘 복음에서도 참된 부는 세상의 재물을 포기할 줄 알고 끊어버릴 마음을 갖는 데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복음을 보면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주제는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끊어버림이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첫째 부분에서는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청년은 처음과 마지막 태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20절), 예수께서도 감탄하시고 대견해하셨다(21절).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하였을 때,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22절). 이 극적인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재산 때문에 나오는 위험이다. 청년은 용기 있게 결심하고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22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참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런 까닭에 처음에 당신이 선하다고 하는 것(18절)을 거절하시며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상기시키신다. 그래서 유일한 선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선(善)들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은 제1계명에 의해 생기를 얻고 조명되지 않으면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실질적으로 버리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을 첫 자리에 놓음으로써 나오는 결과이지 다른 요구가 아니다. 그 청년에게는 하느님보다는 자기의 재산에 대한 집착이 컸으므로 하느님이신 주님을 따를 수 없었다.
둘째 장면은 예수께서 재물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모든 시대의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에 하시는 권고의 말씀이다(23-27절 참조).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24절) 하신다. 두 번째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상징적인 표현을 덧붙이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이 표현은 너무 강해서 좀 부드럽게 해석하려고 하지만, “눈 속에 들보”(마태 7,3)라는 표현을 생각한다면, 청년처럼 재산에 마음을 두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26절) 수군거린다. 구약에서는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는데, 장애물로 말씀하셨고, 또 그 청년이 구원에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낙담한 사람처럼 떠나갔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이 어렵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간이 그 은총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부자 청년과 정반대되는 태도를 보인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그 보상에 대해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의 결실이며 그 은총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알려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29-30절). 여기서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끊어버리는 행위를 요청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끊어버리는 행위가 그 행위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29절) 끊어버리는 행위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와 복음이라는 가치를 소유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자신을 더욱 충만한 존재가 되게 한다. 그 보상은 보편적 사랑과 형제애를 체험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은(30절)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의 풍요함으로 자신이 부유해짐을 느낄 때 그것을 완성해준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박해도 받게 된다고 하신다.
그 박해까지도 믿는 이에게는 영광과 행복을 더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박해까지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며 우리 믿음에 대한 보상의 한 형태라고 한다. 히브리서는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들으라고 권고한다(참조: 히브 4,12). 하느님 나라를 위해 또 복음을 위해 집착을 끊어버리고 있는지 볼 수 있게끔 그 말씀을 통하여 철저히 자신이 드러나도록 내맡기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 재물이나 세상의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자리 잡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오늘의 말씀에 따라, 참된 부, 참된 지혜를 차지할 수 있는 삶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 더욱 풍요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더 일치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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