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쇄신 방향에 대해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자문’ 구하는 과정
하느님 백성 ‘모두’가 부름 받은 것
성직자-평신도 주도권 싸움 아닌
하느님 뜻 식별 위한 공동의 노력
결과보다 함께 걷는 ‘과정’ 중요
의결권을 가진 공의회와 자문권을 가진 시노드의 구분이 의결권을 가졌다고 해서 절대적 상급 기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것처럼 교회의 삶에 대해 자문권을 행사하는 ‘시노드’의 여정에 대한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자문 활동은 교회의 ‘공동체성’과도 연결된다. 교회의 삶 안에 결정 주체가 ‘하느님 백성’이고, 그 안에서 역할은 다양하다. 그래서 그 뜻을 모으는 과정이 ‘자문’이므로 사회적 영역과는 절대적으로 다르기에, 폄하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유럽교회를 비롯한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시노달리타스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가장 대표적 원인이 이 ‘자문권(건의투표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5항은 자문의 내용과 과정을 “공동체 전체가 하느님 뜻에 더 부합하는 사목적 결정들을 내리고자 기도하고 경청하고 분석하고 대화하고 식별하며 조언하도록 소집된다”고 설명한다.
이 모든 과정이 시노드적 과정이고, 자문의 구체적 단계들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보편교회 차원의 ‘세계주교시노드’를 새롭게 설립한 것도, 보편교회 수장인 교황이 ‘자문’을 요청하는 것이다.
자문이 강조되는 만큼 경청이 중요하다. 시노달리타스의 활동 중심에는 경청이 자리한다. 목자와 신자, 신자와 신자,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하느님 말씀을 같이 ‘듣는 것’이다. 단순한 들음이 아니라 ‘경청’ 하는 것이다.
자문 과정에서 ‘조언’ 또한 잘 해야 한다. 내가 원하고 교회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선익을 위해 나의 신앙 감각으로 파악되는 바를 조언하고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의 책임성을 잊지 않아야 한다. ‘기도하고 경청하고 분석하고 대화하고 식별하며 조언’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결정에 도달하는 것은 시노드적인 과정이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사목적 차원에서 목자의 권위에 속하는 직무적인 책임이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자문의 가치와 목자의 고유한 권위가 공존해야 하는 것이다.
시노달리타스 실현을 위한 회심과 쇄신은 개인적 차원과 제도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개인적 쇄신에서는 경청의 자세가 요청된다.
제도적 쇄신과 관련해 제안해보면, 첫째, 평의회의 올바른 제자리 찾기가 필요하다. 공동체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고 얻은 의견을 ‘몇몇 사람’인 임원들이 ‘검토, 연구, 식별’하여 실천 방향과 과제를 도출해야 한다. 그리고 평의회 안에서 ‘한 사람’인 목자의 최종 결정을 돕기 위한 자문 과정을 끊임없이 거쳐야 한다.
둘째, 시노드적 공론장이 활성화돼야 한다. 본당 사목평의회 구성원들은 전체 신자들에게서 다양한 방법을 통한 경청과 공청회, 서면 제안 등 방식으로 신자들 의견을 수렴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는, 공동체 내 대화 문화 조성이다. 모두가 참여하는 시노드적 실현이 되려면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소통 문화가 활성화돼야 한다. 그러므로 경청의 태도와 기탄없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넷째는 성직자 수도자의 지속 교육과 평신도 양성 및 교육이다.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은 곧 ‘교회와 더불어 느끼기’(sentire cum Ecclesia)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이는 교회와 조화를 이루어 느끼고 체험하며 지각하는 것으로서,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이 일치를 이루도록 하며 그들의 함께 걸어가기에 열쇠가 된다.
교회 공동체가 함께 찾고 따라야 하는 근본적이고 궁극적 원리는 ‘여론’이 아니라 교회 구성적 원리인 ‘하느님 말씀’이어야 한다. ‘교회적’이기 위한 기준은 공동체 결정과 지향과 행동이 과연 복음 정신에 부합하는지에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결정하는가’가 아니라 ‘함께 식별하고 있는가?’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수적이다.
시노드 정신은 단순히 정의를 위한 교조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실천적 연구가 지속돼야 한다. ‘시노드 정신의 토착화’ 없이는 시노드 정신의 실현도 불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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