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택 신부는 상아탑에만 머물러 있는 신학자가 아니다. 한 신부는 신학대 교수로 지내면서도 틈틈이 신자들을 위한 책을 쓰고 강의를 하며 신학과 신앙의 참 의미, 구원의 참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원가톨릭대에서 만난 한민택 신부는 “안식년 중인데 오히려 더 바쁜 것 같다”고 했다. 일상이 회복되면서 여러 본당과 단체에서 강의 요청이 많아져서다. 한 신부는 “본당 공동체가 잠에서 깨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고 했다.
소공동체 모임이 재개됐고, 본당 내 단체와 동아리 모임 등도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취소됐거나 미뤄졌던 교회 내 행사도 대부분 이전처럼 개최되고 있다.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고 모임이 제한됐던 시절, 저마다 교회 위기를 거론하며 코로나19 이후엔 교회 모습이 달라져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가 높았지만, 어쩐지 이전과 비슷한 모습이기도 하다. 한 신부는 “본당마다 상황이 다르니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명확한 답을 얘기할 순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코로나19로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었던 신자들을 보면서 박해시대 교우촌을 떠올렸다.
세상과는 다른 문화와 생활 창출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니 조선 사회의 박해시대가 떠오르더라고요. 그 시절 교회로선 박해로 상처 입은 영혼과 공동체를 돌보는 것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코로나로 상처 입고 교회에서 멀어진 사람들에게 좀 더 다가가는 일이 공동체에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신부는 “이전과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첫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복자 황일광 시몬(1757~1802)의 고백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복자는 조선 사회에서 최하층민인 백정이었다. 모든 이가 그를 피했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달랐다. 그를 하느님의 자녀이자 형제로서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르며 “내겐 두 개의 천국이 있습니다. 이렇게 천한 백정을 점잖게 대해 주니 이 세상의 삶이 천국이요, 죽은 뒤에 가게 될 하늘나라가 또 하나의 천국입니다”라고 고백했다.
한 신부는 “박해시대 교우촌의 환경은 척박했지만, 전례 중심, 공동체 중심의 신앙생활로 신앙을 전수하며 고유한 문화와 생활 방식을 창출했다”면서 코로나19 이후 교회의 모습을 박해시대 교우촌에서 발견했다.
“황일광 시몬은 백정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귀하게 대접받았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체험을 한 것입니다. 교우촌에서 영감을 받자면, 지금의 교회도 세상과는 다른 생활과 문화를 만들어 내고 이를 삶으로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여러 차별과 갈등으로 복잡한 사회와 달리 재산, 지위, 학력과 관계없이 인간 존재 자체만으로 존중받는 곳, 무상의 순수한 관계가 맺어지는 곳,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곳이 교회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선교 사명을 새롭게 일깨운 사건
코로나19는 전 세계적 재난 앞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했다. 감염병 시대에 신앙이 무슨 의미인지,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체성에 화두를 던졌다. 한 신부는 “코로나19는 교회의 선교 사명을 새롭게 일깨우는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코로나19로 드러난 교회 현실을 분석할 때 사회학적으로 접근한 연구가 많았습니다. 줄어든 신자들의 숫자, 신앙생활의 변화 등의 연구는 그 자체로 유용했지만, 문제의 본질까지 다다르지 못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제도이자 조직이면서도 동시에 독특한 정체성과 사명을 지닌 영적 신비체기 때문입니다.”
한 신부는 “교회는 부름을 받고 파견된 존재로서 그 지역 안에서 ‘썩는 밀알’로 현존하며 복음을 살아야 한다”면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와 같은 교회 본질과 관련해서 살펴야 한다”고 했다. “인류 문명과 문화의 흐름을 읽어내고 그것을 신앙적으로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교회가 돼야 하는데, 코로나19 상황에서 그렇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선교 사명에 대한 교회 공동체 의식이 많이 약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신앙이 의무가 돼선 안 돼
그는 “신앙생활의 본질은 파견된 삶을 사는 것이지 해야 할 의무를 지키는 것에 있지 않다”고 했다. 더불어 신앙의 공동체성을 강조했다. 코로나19로 공동체 중심이 아닌 개인 중심의 신앙생활과 활동이 부각되는 것엔 우려를 나타냈다.
“그리스도 신앙은 본래 공동체적 신앙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신앙의 원천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에 있습니다. 신앙은 그 친교에 참여하는 것이고, 신앙인은 서로 형제자매가 돼 공동체 친교를 통해 살아갑니다. 코로나19로 신자들이 공동체 신앙생활에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면, 그건 기존 신앙생활이 영적 공동체 중심이 아니라 제도와 예식, 의무 중심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 신부는 “신앙은 의무가 아닌 하느님 구원 은총과 사랑에 대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응답”이라면서 “제도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신앙을 제도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본질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앙의 본질과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 매우 필요한 일임을 일깨웠다.
신앙이 기쁨이고 행복이며 희망이고 사랑임을 깨닫는 여정은 한 신부 저서의 주된 주제이기도 하다. 「하느님과의 숨바꼭질」(2017), 「내맡기는 용기」(2018), 「내 삶에 열린 하늘」(2020)에는 그가 체험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찬미로 가득하다. 한 신부는 확신에 찬 어조로 그리스도 신앙이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의심과 좌절 중 깨달은 주님 사랑
한 신부는 수원가톨릭대 대학원 재학 중에 프랑스 파리가톨릭대로 유학을 떠났다. 석사를 마치고 2003년 1월 현지에서 부제품을 받고, 귀국해 9월 한국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년간 보좌 신부로 지내다 이듬해 9월 다시 유학을 떠나 2011년 9월 박사과정을 마무리 짓고 학위를 받았다.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신앙에 대한 도전과 비판에 합리적으로 대응하는 기초신학 공부는 적성에도 잘 맞았다. “이 시대에 신앙을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게 근거를 제시하고, 현대인들이 신앙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도록 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유학 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부를 잘 마칠 수 있는지 걱정이 쌓였고,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지 의구심이 들었다. 불안과 의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한 수도원에서 성주간을 지냈다. 성유 축성, 발씻김 예식 등 성삼일 전례에 참여하면서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하느님 사랑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한 신부는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자 은총이라는 걸 새롭게 느끼게 됐는데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이었다”고 회고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신학자인 조셉 도레 대주교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많은 짐과 걱정거리를 짊어지며 사는데, 신앙이 그 위에 얹어진 또 다른 짐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 행복이며 기쁨이 돼야 한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래야 합니다. 신앙의 참 기쁨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구원은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약속
그러나 요즘 시대엔 신앙과 종교 자체에 물음을 던지는 이들이 많다. 무신론을 자처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구원 자체엔 아예 관심이 없다. 특히 코로나19 확산 시기에 사람을 살리는 건 종교가 아니라 과학과 의학처럼 보였다. 한 신부는 “코로나19가 가져온 사회적, 정치적 파장을 고려하면 코로나19 문제가 단순히 바이러스와 관련된 생물학, 의학과 관련된 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종교와 신앙이 일깨워야 합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에 접근하는 다른 차원의 방법,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신앙이니까요. 사람들이 구원에 관해 관심이 없는 건 구원에 대한 유아기적 신화론적 사고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시련이나 고통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라 생각하는 건 잘못된 겁니다.”
한 신부는 “신앙이 고통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그 고통을 새롭게 살도록 해준다”면서 “그러기에 신앙인은 고통을 인간 완성을 위한 계기로, 더 큰 발전을 위한 희망의 동기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에게 주어진 고통을 달리 살고, 고통 중에 있는 이웃과 함께하며, 그 안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신앙인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가난한 이들의 삶이 교회의 삶 돼야
그는 “한국 교회가 한 시대가 끝나는 지점에 와 있다”고 진단했다. 부모가 신자면 자녀도 신자이고, 또 신자와 만나서 결혼하는 신앙생활과 신앙전수의 방식들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다. 주일학교 제도, 교리교육 형식 등도 기존의 해왔던 틀이기에 더는 버티질 못하는 현실이다.
“한국 교회를 보면 한 시대의 종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흐름은 이미 유럽을 강타했고, 그러면서 나온 좋은 변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가톨릭교회는 완전히 바뀌었지요. 세상을 향해 대화하려고 교회 울타리를 벗어났고, 기득권 세력을 내려놓았고요. 우리 교회의 위기로 여겨지는 문제들은 새로운 교회 생활, 새로운 신앙 전수 방법이 필요하다는 걸 전방위적으로 알려주는 사인이라고 봅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한 시노달리타스에서 변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성직자에겐 세속적 권위를 내려놓고 평신도와 함께하는 삶의 방식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고, 가난한 이들의 사목으로 변화가 요청된다고 강조했다.
“물질적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교회의 삶이 돼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불의를 고발하고 희망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될 것이며 성화될 것입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22.10.30 발행[16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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