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살았던 사람.
지난해 김씨돌로 알려진 김용현 요한 씨의 삶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요.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김 씨의 사연이 추가로 전파를 탔습니다.
이 시대의 의인, 김용현 씨의 삶의 궤적을 다시 따라가보겠습니다.
[기자] 세 개의 이름과 세 가지의 삶.
청년 김용현은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군 의문사의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달려가 구조에 앞장섰습니다.
구미 산동골프장 반대를 외치는 주민들에게는 등불 같은 존재였습니다.
김 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구 반대편 파라과이에도 있습니다.
지난해 김용현 씨의 삶이 다큐를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국민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김 씨가 어떻게 남을 위한 삶을 살게 됐는지 명쾌한 답을 찾을 순 없었습니다.
다큐를 제작한 이큰별 PD는 김 씨의 삶의 궤적을 추적했습니다.
김 씨의 유년 시절 흔적은 대구에서 발견됐습니다.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는 SOS어린이마을.
김 씨는 SOS어린이마을 1호 어머니의 1호 아들이었습니다.
(배기현 주교 / 마산교구장) "그래서 결국 보니까 1호집 엄마 마르타 씨는 참 큰 사람이에요. Little big man이죠 어떻게 보면. 깊은 샘솟는 어머니다운 사랑의 힘. 이게 아주 크다고 봐요. 그 때문에 지금도 품위를 지니고 있는 거죠 말하자면. 그게 보이지 않게 용현씨한테도 연결돼있지 않나 싶어요."
(이종건 신부 / 한국SOS어린이마을 대표이사) "제일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다 배운 것 같아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자기도 도움을 받았듯이 또 어머니를 봤듯이 이게 살아오면서 배어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김용현 씨는 청년 시절, 약자의 편에 서기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고교 재학 당시 교련반대 시위 이력 때문에 공부를 중단했습니다.
장애인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 제주로 내려왔지만, 되려 간첩으로 몰렸습니다.
2005년 만들어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진상규명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흐지부지 됐습니다.
그럼에도 김 씨는 타인을 위한 삶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아픔을 살뜰히 보듬었습니다.
김 씨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를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김요한씨는 진짜 고맙죠."
"미안하다 고맙다 이런 생각을 항상. 그 요한이라는 이름은 안 잊어버리더라고요."
"씨돌이 아저씨는 너무 고마워. 내 몸은 챙기지도 못하며 남을 챙겨주려 애쓰고."
"김씨돌 선생님이 뒤에서 묵묵하게 잡일들을 다 처리하고 도와주고."
"순수해 보이는 사람이 구조 현장에서는 굉장히 강하게 목숨을 걸고 했어요."
"용현 김씨돌 선생님께, 꽃을 묵묵히 지지해주는 줄기처럼 살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인간다움에 아름다움을 더해주어 감사합니다."
SBS 이큰별 PD가 김용현 씨에게 묻습니다.
누구나 빛나는 별이 되길 원하는 세상에서 구름 뒤로 가려지는 삶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이큰별 PD) "선생님은 요한·씨돌·용현으로 살아오는 동안 민주화운동도 하시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는 사람도 구하시고 그런데 그런 일들이 정작 선생님한테 관계되는 일은 없었잖아요. 왜 그런 삶을 사셨어요?"
(이큰별 PD) "뭐라고 적으셨어요? 선생님."
(김용현)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지금까지 앵커 리포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