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저의 경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겼던 것 같습니다. 옆집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제 장난감보다 더 좋아 보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의 가방, 옷차림 등에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지 않는 부모님께 대한 원망도 가졌습니다.
시기심은 평등의 원칙이 깨졌다고 생각될 때 나옵니다. 그토록 갈망했지만,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삶을 누군가가 살고 있을 때 불평등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불평등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삶을 보고 자기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도 순간의 만족일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감정을 통해, 불공평의 결과는 나의 욕심일 뿐 불공평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욕심 가득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삶이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상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고, 또한 다른 이들을 향해 축하의 마음을 전달하는 여유도 갖게 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자기 안에서 치워나갈수록,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게 됩니다. 여유와 편안함을 갖게 되고,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필요한 사랑의 마음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율법에 나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이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인 사랑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통해 하십니다.
자기는 옳고 따라서 자기는 당연히 최고의 것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말로써 정의를 잘한다 해도, 이웃으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즉, 율법의 세부 조항을 열심히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욕심, 시기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한 나라의 정승이라면 모범을 보이고 백성과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정홍순).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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