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휴식은 언제 시작되는가?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체험한 놀라운 일들을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라며 자랑스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시며,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복음을 전한 뒤의 쉼은 꿀 같은 기쁜 일입니다.
이들은 진정 휴식을 취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휴식을 잘 취합니까?
주말에 온종일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한가요? 물론 몸은 그럴 것입니다.
명절 연휴를 보내고 나면 기쁘신가요?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완전히 개운하고 기쁜 휴식을 취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안식’, 즉 ‘휴식’은 이런 쉼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휴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생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고생합니다.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녀를 키우고, 자녀가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인정받으려는 근저에는 자신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를 부모가 다 채워주면 좋겠지만 사실 부모에게도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더라도 다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취직하고 일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휴식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진정한 휴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더 유능한 인재까지 못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했던 것일까요? 아버지에게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여 이민 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형에게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휴를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이무석 교수를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심지어 증오하였습니다.
어느 날 휴가 만나자고 하였을 때 이무석 교수는 휴가를 간다며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상담자가 이렇게 자신의 정보를 흘려주지 않는 이유는 내담자가 상담자에게서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투사 시켜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울이 깨끗해야 자신이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도 이 교수처럼 휴가를 떠납니다.
휴가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이때 이 교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휴는 이제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무석 교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아버지를 투사하여 함께 박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꿈에 아버지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마리 개가 나왔습니다.
그 개는 점점 커져서 소파의 수십 배 크기가 되었습니다.
소파는 아버지를 상징하고 개는 자신을 상징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개로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소파보다 커 버린 자신은 더는 소파에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의 시작입니다.
사탄이 사는 곳은 어딜까요? 지하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십니다.
하늘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세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는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인정받고 싶게 만드는 누군가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고, 그 부모를 투사시킨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금 사랑하다가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줘야 했지만 사랑해주지 못한 데 대한 분노가 그 사람에게 투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사랑했다가 갑자기 미워한다면 그래도 사랑해주십시오.
그 사람은 나를 누군가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그 사람을 고생시키는 바로 그 권세도 함께 못 박힙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할 수도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 모든 애증의 대상을 투사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면 그 산을 넘어 에덴동산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휴식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를 고생시키는 모든 하늘의 권세가 함께 못 박힙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에게조차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질 때, 나는 참된 휴식, 참된 안식에 들어갑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했던 사람이 하는 미움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나에게 투사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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