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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01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10-01 조회수 : 190

강의할 때 종종 감동적인 영상을 보여줍니다. 지난번에는 네 살짜리 꼬마 아이가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를 그리워하는 영상을 틀었습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아빠에 대한 그리움에 도화지에 아빠를 그린 뒤에 “아빠, 보고 싶어.”라면서 그림을 자기 가슴에 안습니다. 이 영상에 신자들이 여기저기 훌쩍거리면서 곧 성당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떻게~~~”하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하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인간 내면에 깊이 심어주신 본성입니다. 하지만 이 본성을 벗어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무례하고 불친절한 사람,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 사람을 단순히 경쟁 상대로만 보려는 사람….


우리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본성인 사랑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사랑을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다시 찾으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도보로 사흘이 걸리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국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이지만, 민족적으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 취급하며 그들의 음식을 부정하다 하여 먹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던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한 4,,40-41).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개심보다는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는 유다인들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홀대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마음으로 유다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대우하는 유다인이나, 또 스승을 홀대한다고 벌하겠다고 하는 모습이나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본성인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본성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진심을 담아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읽을 수 있다(하윤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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