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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9-14 조회수 : 245

민수기 21,4ㄴ-9       요한 3,13-17  

 

십자가의 거울 효과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오늘 독서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를 따르다가 불평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뱀을 보내어 물어

죽이게 하셨습니다. 

뱀이 곧 불평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려 살려달라고 청하자, 하느님은 모세에게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도록 하시고 그것을 보는 이마다 치유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뱀에 물린 이들을 위해 매단 짐승은 뱀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동물이 매달렸다면 어땠을까요?

전갈을 매달았으면 어떨까요? 양이나 소를 매달면 어떨까요? 그것이 분명 죗값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고 자기가 지은 죄만을 씻으려 할 것입니다. 

죄의 원인이 씻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뱀이 죽지 않으면 죄를 지어도 죄인 줄도 모릅니다.

뱀이 모든 죄를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뱀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를 짓게 만드는 자기가 뱀임을 볼 때 비로소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뱀이 되기를 원치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어느 신문에서 전과자들의 간담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절도 전과자들은 자신의 경험담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때 멈칫하게 하거나 절도를 포기하고 나오게 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 명의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주인이 코를 골고 자면 도둑질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코 고는 소리에 맞추어 한 발짝씩 떼어 놓으면 행진곡에 맞추어 입장하듯이 들킬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이 너무 고요하면 그냥 포기하고 나오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난 도둑질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집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들이 가지런하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흐트러져 있으면 내 집같이 마음 놓고 들어갑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거든요.” 

 

어떤 전과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둑질하다가 뛰쳐나온 적이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칼을 빼 들었죠. 근데 그 괴한도 칼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괴한이 저라는 것을. 그날은 도둑질 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거울’입니다.

카지노에는 거울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죄에 빠져있을 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자아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본 모습이 드러나게 만드는 거울입니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순결했던 주인공은 ‘창녀’라고 써진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해 그 글자를 지웁니다. 

하지만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악해지기로 했을 때는 거울을 당당히 바라봅니다. 

자기의 모습이 뱀이어도 상관없다고 할 때 죄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거울을 비추어주심으로 자아의 참모습을 보여주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남의 집에서 일만 죽도록 하고 매도 죽도록 맞으며 자라서 다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불평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바다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나병 환자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냐?” 

 

예수님은 당신이 안 해줘서가 아니라 자아가 불평 자체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살 힘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죄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보지 못하면

죄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십자가를 보며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지은 죄들을 보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는 것입니다.

내 죗값은 두 배나 네 배로 갚아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죗값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셨습니다. 

나가 곧 죄이고 나가 죽기 전까지는 죄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내가 죽는다면 비로소 자동적으로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뱀의 모습으로 우리 자아의 거울이 되어주셔야 했을까요?

다른 사람이면 안 됐을까요?

안 됩니다. 뱀만 죽이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만 자아가 죽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초기에 사목할 때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가출 청소년들을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이었고 전과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박 목사를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 찌르고 내 말 좀 들어봐라!”라며 복음을 전해 거둬들인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너무 없어, 라면 하나를 끓여 7~8명이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고픔을 못 이겨 도둑질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유는 그들이 도둑질하고 온 돈을 십일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을 때는 목사님이 직접 가서 아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한 주인에게 매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목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때뿐이었고 배고프면 또 도둑질하러 갔습니다.  

 

그날도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나오는데 아이들은 심각하지 않은 듯 자기들끼리 웃고

농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 되겠다 싶어 박 목사는 교회에서 한 아이를 세워놓고 쇠파이프 막대기로 힘껏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막대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이 나를 10대씩 때려라.

대신 9대 때렸다가 마지막 1대라도 살살 때리면 다시 때리게 할 테니 힘껏 때려라.” 라고 말했습니다.

두 아이에게 20대를 맞았는데 박 목사는 너무 아파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너무 아파요. 더 못 맞겠어요.” 

 

박 목사는 세 번째 아이가 죄송하다며 때린 매에 허리 밑 꼬리뼈를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매를 맞았고 그렇게 80대를 맞았습니다. 

 

박 목사는 그 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안 좋아 항상 뜨거운 팩을 붙이고 다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던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박 목사가 아이들에게 “왜 나를 때리고 나서 너희들이 변화되었느냐?”라고 물으니, “세상이 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뒹구는 목사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자기들 때문에 허리가 부러진 한 목사를 본 것입니다.

자기가 맞아야 할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목사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박 목사를 통해 자기 자아만 본 것이 아니라 그 목사가 자신들과 하나가 되며 자신들도 그 목사만큼이나 대단한 존재였음을 본 것입니다. 

 

만약 박 목사가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사랑하는 강아지를 죽이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는 볼 수 있지만, 죄가 가리고 있는 그들의 본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그냥 강아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죽인다면 어떨까요? 

‘내가 그리스도인데 지금 뱀과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죄에서 해방해 주기 위해서는 그 거울 뒷면에 “넌 본래 그렇게 살 존재가 아니었어!”라는 말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울을 보며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내 죄를 대신해서 보속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 봐야 또 죄를 짓습니다.

존엄한 존재였다가 처참하게 깨진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뱀이 나의 하느님과 같은 존귀한 모습을 잃어버리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입니다.

나는 본래 하느님의 자녀였는데 내 안의 뱀이 나를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버렸음을.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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