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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9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9-09 조회수 : 239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생각됩니다. 누나 방에 들어갔다가 아주 낯선 모습을 본 것입니다. 훌쩍이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프냐고 물으니 읽고 있던 책 내용이 너무 슬프다는 것입니다. 며칠 뒤, 누나가 외출해서 자리에 없을 때 방에 들어가 눈물 흘리며 읽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과연 누나처럼 눈물을 흘렸을까요?


흘리긴 했습니다. 책 내용이 너무 지루하고 이해가 안 돼서 하품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었고, 더군다나 책과는 친하지 않았던 시기라 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해하기 힘든 한 가지는 ‘어떻게 책을 읽으면서 울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어떨까요? 지금도 책을 읽으며 울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현재 책을 읽다가 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의 마음에 동화될 때입니다. 책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동화됩니다. 우리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에 감사해서 눈물도 흘리게 됩니다. 일상 속 기쁨도 주님을 알면서 더 커지고 의미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원하는 것만을 외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발할 구실만을 바라보고 있지요. 안식일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칠 것인지, 그냥 내버려둘지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커다란 스캔들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을 고쳐주시면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당사자가 사랑하는 가족을 고쳐주셨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때는 예수님의 사랑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보지 못하니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를 서로 논의합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봐야 이 세상을 더 잘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하루하루를 산에 오르는 것처럼 살아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등반하되 지나치는 순간순간의 경치를 감상하라. 그러면 어느 순간 산 정상에 올라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며, 그곳에서 인생 여정 중 최대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해럴드 V. 멜처트).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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