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6,1-5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롭고 따뜻한 아버지로 다가가신 예수님이었지만, 율법 지상주의에 깊이 함몰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분이 또한 예수님이셨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언제 들어도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그들은 특히 안식일 규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규정들을 셀수도 없이
많이 만들고 나서는, 누가 규정을 어기는지 매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기만 가차없이 잣대들 들이대며 단죄하고 처벌했습니다.
그들의 과도한 가르침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극히 사소한 일도 절대 금지였습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밭갈이, 파종, 수확, 단묶기, 타작, 키질, 선별, 분쇄, 체질, 반죽, 굽기, 글쓰기, 건축, 이사, 점등, 소등 등등.
너무나 웃기는 부분도 수두룩합니다. 안식일에 촛불을 켜는 것은 금지되지만, 촛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손수건을 옷에 달고 사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땅에 침을 뱉는 것도 금지요,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금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같은 규정입니까?
안식일에는 약 1킬로 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가능하나 그 이상 걷은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엿새간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 편안한 몸과 마음을 쉬라는 의미에서 제정된 안식일 규정입니다.
안식일 날 편안한 복장으로 호젓한 산길 3~4킬로 천천히 걸으면 그 얼마나 편안한 휴식이겠습니까?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밀이삭을 추수하는 규정도 꽤나 까다로웠습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이웃집 밀밭에 심어져 있는 밀 이삭을 그 자리에서 잘라 먹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낫을 대는 것을 금지되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잣대는 점점 수위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배배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처럼 관찰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신명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도 아닌데, 마구잡이로 들이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2)
고지식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날카롭습니다.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5-8)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수는 참으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생하는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한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속박하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규정이 되고만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근본 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모릅니다.
기쁨 없는 봉사 역시 위험합니다.
자비없는 선행의 실천 역시 부담입니다.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역시 행복한 얼굴로 행해야 마땅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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