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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6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9-06 조회수 : 182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잘 알 것입니다.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독일 작곡가로 영웅, 운명, 황제, 합창 등의 교향곡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쓴 9번째 교향곡 ‘합창’을 발표할 때, 그의 귀는 완전히 들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럼에도 그는 열심히 작곡에 임했고, 합창 교향곡 마지막 4악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환희의 송가(ode to Joy)를 작곡합니다. 들리지도 않는데 왜 작곡했을까요?


자기는 듣지 못해도 타인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본인이 경험할 수 없는 기쁨을 다른 이와 나누기 위해 이 곡을 쓴 것이 아닐까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고 싶습니다. 실제로 자기가 경험할 수 없는 기쁨을 나누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타인과 내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나만 행복한 것도, 남만 행복한 것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타인의 행복을 보면서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그 행복에 문제 있는 것이라면서, 어떻게든 깎아내려고 합니다. 나만 옳고 나만 행복하다면서, 상대의 행복이 잘못된 것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과연 진정한 행복일 수 있을까요?


타인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복에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짜 사랑의 삶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경건한 사람들로 여겨졌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정말로 율법에 충실했고 신앙심도 깊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이런 노력과 달리 예수님과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니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그 행복한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기쁨을 깨뜨리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에서는 혼인 잔치를 일주일 동안 치렀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단식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신랑이고, 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인 그리스도인은 단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빼앗길 날,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게 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일 뿐이었습니다. 자기의 열심을 알리기 위한 것,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단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짜 단식을,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는 단식을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의 명언: 사랑은 신뢰의 행위다. 믿으니까 믿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대단한 이유는 없다(로맹 롤랑).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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