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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9-05 조회수 : 278

루카  5,1-11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첫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첫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그들을 부르시되 말로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먼저 은총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고기가 엄청 많이 잡히는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 누구나 갖는 공통된 감정입니다.

저도 신학교로 불러주시면 그에 합당한 은총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성모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정말 성모님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건 첫 번째 느낌은 같았습니다. 

 

저는 성당 마당에 무릎을 꿇었고 한참을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마음으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사람이 주님과 어느 정도 가까이 있는지를 판단해야 할 상황이 오면 그 사람이 이 감정을 가졌었는지를 살핍니다.

그러한 감정을 가졌었다면 사람을 덜 판단합니다.

하느님 앞에 한 발짝 갈 때마다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타인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한 번 배반한 유다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잘살고 있다고 믿었지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듣고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는 누구보다 죄인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완전했던 사도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았을 때 그조차도 그분 앞에서 설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요한 1,17)  

 

영화 ‘벤허’(1959)에서 유다 벤허는 예루살렘에서 존경받는 유대인 귀족입니다.

그는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유대 민족주의자이자 깊은 신앙심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오랜 친구였던 메살라가 로마의 장군으로서 예루살렘에 돌아오면서 상황이

급변합니다.

메살라는 벤허에게 유대인 저항자들을 배반하라고 요구하지만, 벤허는 이를 거부합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고, 메살라는 벤허를 반역자로 몰아 그의 가족을 감옥에 가두고, 벤허를 노예로 처벌합니다. 

 

벤허는 노예로 끌려가 로마의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고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곳으로 끌려갈 때 나자렛을 지나치게 되었고 자신에게 물을 주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벤허는 여전히 강한 의지로 버티며 복수의 마음을 품습니다.

한 전투에서 벤허는 로마의 군사 지도자 퀸투스 아리우스를 구해 그의 신임을 얻게 되고, 결국 해방되어 로마로 가게 됩니다. 

 

벤허는 로마에서 퀸투스 아리우스의 양자가 되어 명예를 회복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메살라에게 복수할 생각뿐입니다.

벤허는 메살라가 참가하는 전차 경주에 나서고, 치열한 경쟁 끝에 승리하며 메살라를 쓰러뜨립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배경으로 그려집니다.

벤허는 여러 차례 예수님과 마주치게 되며, 특히 골고타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며, 벤허는 자신의 복수심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 앞에서 복수만을 생각해 온 자신이

그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분 앞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때 어머니와 여동생도 기적적으로 나병에서 치유되면서, 벤허는 진정한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압도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나아갈 때는 언제나 자신이 죄인으로 여겨지는 두려움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싫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내가 주님을 판단하고 주님 앞에 무언가 많이 드린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내가 주님 앞에 죄인이고 주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의무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 때마다 그때를 기억했다고 합니다.

저는 다 주신 주님 앞에서 무언가 주고 있다고 착각했을 때를 기억하려 노력합니다.

이 만남의 상품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런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존 뉴턴은 노예상을 하다 폭풍우 중에 하느님을 만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는 성가를 작곡합니다.

주님 앞에 서면 항상 우리는 죄인이고 그 덕분에 자신 외에 누구도 심판할 수 없고 이 때문에 더 큰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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