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요한 6,60-69: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을 전해주고 있다. 복음에서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당신을 만나려면 무엇보다도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몸과 피는(참조: 요한 6,54-56) 확실히 볼 수 있는 빵과 포도주라는 실체를 통한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빵과 포도주라는 형상 때문에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께 반감을 품었던 유다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에 대해 집중시키기 위해,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를 다시 입게 하려고 당신의 말씀을 설명해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살) 대신 영(성령)에 의탁한다면 더 위대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3절) 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은 육으로는 하느님의 신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의 문제가 나온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64절) 하신다.
그러므로 육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발심과 배척감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이들에게는 신앙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육에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왔음을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모두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이며, 그 말씀을 통해 생명의 빵이신 당신 자신을 점차 드러내고 계시다. 이 말씀들은 신앙을 통해 받아들여질 때, 영이며 생명이 된다. 성령을 통해 살아있는 그 말씀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들이다.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도 성사로 이해한다. 말씀과 성사는 그리스도의 실재 전체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하고 물으신다. 제자들이 당신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반대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라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대답하는데 처음에는 자신이 없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68절) 그러나 곧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원천임을 깨닫고는 기쁨과 확신에 차서 확실하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8절) 고백한다. 마침내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9절) 한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는 말씀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을 갖추고 계심을 고백한 것이다. “믿고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는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며, 앎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사실 믿음은 앎의 최고 형태이다. 그러나 그 인식의 기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신앙의 위기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앙의 결핍이 무엇보다도 사랑할 능력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신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우리가 성령 안에 살고 있다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여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나누어주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저버릴 것인지를 결정하고 선택하게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을 기억하고서는 주님을 선택한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4,16.18) 우리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면서 항상 그분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사는 항상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그러해야 한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 요구는 당시의 상황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한다면 누가 첫째이고 누가 나중인가를 따지지 않는다. 바오로는 첫째가는 사람이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하셨듯이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랑의 관계에서 둘은 서로 간에 사랑의 대상으로서 남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특히 남편과 아내가 상호 신뢰심으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폐쇄적인 태도와 이기주의적인 모든 것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힘을 얻는 원천으로 제시하고 있다. 혼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위대한 신비가 되어야 한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2) 이러한 혼인 생활은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와 교회를 쇄신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며 언제나 하느님의 편에서 살아가면서 그분의 참된 자녀로서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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