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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8-23 조회수 : 305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마태오 22,34-40 

 

연애와 사랑은 무엇이 다른가? 

 

 

2010년 한 여성이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4개월 때였습니다.

다행히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제왕절개 시술이 가능해질 때까지 5개월간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 속에 누워있었고, 9개월이 되자 병원으로 옮겨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들은 산모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지키던 가족들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녀를 지키는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 가오 친빠오였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시간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서툰 말투로 대화도 건네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병원 음식을 씹어 자기 입으로 엄마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 주는 것처럼 행동하던 2013년 5월, 아기가 작은 소리로 엄마를 부를 때 엄마가 눈을 떴습니다.  

 

중국 장롱샹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 기사화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야 3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리맡에서 미소 짓는 아기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고요.” 

 

의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는 음식을 겨우 삼킬 수만 있었고 씹지 않은 것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음식을 씹어 엄마의 입속에 넣어주었을까요?

[출처: ‘왓칭 2: 시야를 무한히 넓히려면’, 김상운, 정신세계사] 

 

정말 대단한 아기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아기의 사랑은 정말 순수할까요? 아기가 무슨 정신으로, 어디서 배워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아기는 엄마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 것입니다.

나중에 엄마가 다 나아서 아이에게 사랑을 퍼부어 줄 때 아기는 자신이 투자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게 작다고 불평을 할 것입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아픈 여자를 위해 비를 맞으며 마지막 잎새를 벽에 그려 넣은 나이 든 화가는 정말 사랑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요?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평생 그림을 그려왔지만, 누구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자 그렇게라도 한 여자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무 사랑 자체를 이기적인 것으로 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것을 ‘연애’라고 하겠습니다. 연애는 사랑이 시작되기 이전의 단계입니다.

많은 이들은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연애는 모기 두 마리가 하는 거지만, 사랑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가 하는 것입니다.  

 

둘이 모르는 사이였을 때는 오히려 싸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이 서로 연애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지금까지 투자한 것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원하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둘 다 똑같이 그렇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서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이렇게 좋아하게 만드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네가 나를 좋아하는 감정으로 행복하다면 이제 나도 행복하게 해 줘야지!’ 

 

결국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것입니다. 연애는 투자입니다.

투자는 내가 투자한 것보다 더 벌어야 만족합니다.

그러나 서로 연애하게 된 이상 이전보다 더 열심히 투자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서로 서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투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다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의 사랑이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이것으로 이미 이웃에게 합당한 보상이 오지 않더라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웃 사랑은 기필코 하느님 사랑과 연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 투옥되었던 동안 가족이 있는 다른 수감자와 교환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예를 생각해보십시오. 성 막시밀리안의 사랑은 개인적 이익이나 

 

감정적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에 상대가 반응이 없어도, 오히려 나는 빵을 주는데 그 사람이 칼을 주더라도 나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보상이나 인정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진실합니다.

그러면 언제 연애에서 사랑이 될까요? 하느님께서 상대를 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을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그 사람은 이제 연애에서 사랑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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