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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8-13 조회수 : 232

내가 죽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린이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작은 생명도 죽이지 못하고 살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자기를 비운다는 말과 같고 자신을 죽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면 자신을 죽이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모든 선택의 기준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정말 행복할까요? 하버드대 연구원으로 지내던 37세의 뇌 과학자였던
질 볼트 테일러는 샤워 도중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갑자기 어지러워 비틀거리다가 욕실 벽을 손으로 짚습니다.
그런데 어디부터가 자기 손이고 어디까지가 욕실 벽인지 구분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 이유는 언어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영역인 좌뇌 쪽에 출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까 이번엔 자기가 누군지 내 이름이 뭔지 어떤 사람인지조차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례로 시끄러웠던 그녀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고요하고 조용해집니다.
나와 세상을 구분하기 물리적 경계가 희미해지고 그냥 엄청난 우주의 에너지 자체만을 느낍니다.
모든 것과 하나가 된 거 같은 기분을 그녀는 이런 느낌을 마치 요술 램프에서 빠져나온 지니가
된 거 같았다고 표현합니다.
테일러는 이런 경험을 두고 “나의 정신적 에너지가 행복이 넘치는 침묵의 바다를 거대한 고래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라고 표현합니다.  
 
좌뇌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재잘거림을 통해서 우리를 삶에서 뒤처지지 않게 해줍니다.
좌뇌의 언어 중추가 나는 누구누구,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느끼게 합니다.
이때 우뇌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사람을 인류라는 가족의 평등한 존재로 여기고 국적 인종 종교 이런 인간들이 많은
경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린이들의 뇌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어린이들은 좌뇌가 덜 활성화되어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온 우주와 하나가 되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출처: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깨달음, 심리학 고양이, 유튜브]  
 
그렇다면 자아, 곧 나가 죽으면 모두가 참 행복을 느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어쨌거나 세상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관계의 친밀함에서
오는 행복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가 힘들어 스스로 관계를 위해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자아를 죽이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세계적인 뇌 과학자 애덤 지먼은 자기가 죽었다고 말하는 48세 환자 그레이엄과 만납니다.
그레이엄은 이미 본인이 죽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한 표정은 짓지 못합니다.
사실 이는 그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무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니콜라스의 부모님은 항상 마약에 절어 있었습니다.
열두 살 되던 해에 니콜라스 엄마와 양아버지는 자주 싸웠으며 어느 날 어머니가 부엌에서 피를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니콜라스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서너 걸음 다가갔어요. 정상적으로 걷다가 갑자기 꿈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그 후로 니콜라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몸까지도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태로 살게 됩니다.
현실은 안개가 자욱하고 꿈 같거나 시각적으로 왜곡된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내 생각인데 내 생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나 내 감정이지만 마치 남의 감정처럼
멀게만 느껴집니다.
[출처: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된, 소위 '걷는 시체 증후군'으로 불리는 전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정신질환, 심리학 고양이, 유튜브]  
 
이런 경우는 자아가 사라져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실 자아가 사라진 게 아니라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를 감추어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으면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맺기 위해 현실에서 반응하고 느껴야 할 주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아를 죽여나가는 방향은 세상을 끊는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을 어린이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자아가 지나치게 강해지지 못하는 환경이 자기를 밀어 넣습니다.
바로 부모라는 존재의 품입니다.
그 품 안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기, 배고파요!”라고 말할 때 그 아기가 자기일 수 있습니다.
왜 제3자로 자기를 표현할까요? 부모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기를 부모와 함께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스크루지 영감은 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색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 노인이었지만,
자신이 죽었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회개하여 모든 사람을 잘 받아들이는
존재가 됩니다.
그는 살았지만, 죽었다고 믿고 살게 되었기에 착해졌습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함이 아닌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되기 위해 자아를 잊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이 행복이 지속되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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