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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1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4-08-10 조회수 : 312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2코린토 9,6ㄴ-10        요한 12,24-26 
 
​고행과 자기 학대의 차이점 
 
 
신자 중에서 가끔은 용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성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찾아가, 기도도 청하고 예언도 듣고 치유와 가르침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분들은 대부분 외모가 비슷합니다.
생김새가 비슷하다기보다는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합니다. 
 
일단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예쁘게 보이려는 마음까지 주님께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반반 섞여 있습니다.
전혀 꾸미지 않고 그냥 고무줄 하나로 묶고 다닙니다.
옷도 생활 한복과 같은 멋을 낼 필요 없는 수수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성당에 앉아 있거나 엄청난 시간을 기도와 성경 필사 등에 투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가치 있는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학대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행은 좋은 것일까요?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세속-육신-마귀와 싸우기 위해
단식하시며 고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행은 좋은 것이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행이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런데 고행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자기 학대일 뿐입니다. 
 
인도에 70년 이상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프라흘라드 자니’입니다.
그는 하늘의 기운을 마시며 산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여신의 축복을 받아 신비한 능력을 갖추게 된 이후로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살아왔다고 주장합니다. 
여신 때문인지 그는 여성의 모습처럼 분장하고 다닙니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자 인도 국방연구개발기구(ORDO)는 2010년 15일 동안
병원에서 그를 관찰하였습니다. 사람이 15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30명의 의료진이 카메라와 CCTV를 통해 그를 살펴본 결과 정말 그는 음식과 물을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화장실에도 간 적이 없습니다. 
 
놀란 의료진은 15일 뒤, 자니의 장기와 뇌, 혈관 등을 검사했으나 그 수치가 모두 정상인의 안전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뇌의 상태는 25세 젊은이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DRDO는 그를 더 연구하면 군인들이 전장에서 음식물 없이 견디거나 재난 상황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하는데 보탬이 되는 의학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수행은 그저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고매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습니다.
“스승님, 드디어 제가 물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이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더냐?”
“20루피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너는 2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20루피를 번 것이니라.”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거의 경지에 오른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답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세나.” 
 
왜 스승들은 이런 시도를 하는 제자들을 칭찬해주지 않을까요?
그런 일을 하려는 목적이 자기 영광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유학 가서 신학생 때 고행을 한답시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잤습니다.
그러나 결국 음식을 먹을 때는 폭식을 할 때도 있었고, 잠은 수업시간에 잤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저 고행 자체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려고 하는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자기 학대는 자기만족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고행은 사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생을 말합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으면 반드시 거쳐서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 목적지가 사랑이라면 그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이 고행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를 죽이는 일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 고행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 아니면 자기 학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오히려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머리도 예쁘게 단장하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배가 불러도 필요하면 더 먹어주기 위해 당하는 고통이 바로 고행입니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것이 고행인 것입니다. 
 
한국의 방송국이 ‘프라흘라드 자니’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15일 단식 당시의 기록을 상세하게 살폈습니다.
그랬더니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에는 방광에 소변이 가득 차 있다가 샤워한 후에는 그 소변이 싹 빠져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샤워 물을 마시고 그때 소변을 보았던 것입니다.
훈련되면 음식 없이 40일 이상 사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고 합니다.
자니씨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생한 자기 학대의 삶을 산 것뿐입니다. 
 
반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황제가 원하는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덕분으로 자신은 불로 달궈진 석쇠에 구워지는 고생을 하였으니 그것은 정말 고행입니다. 
그것은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몸을 조금 괴롭히는 것도 그것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한 열매의 목적이 아니면 상은커녕 평생을 자기에게 자기가 속은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밀알은 썩어야 하지만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썩어야 합니다.
그 열매란 나의 고생으로 이웃이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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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복음: 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자신을 없이 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내가 아닌가!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는 첫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은 자신이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 대열에서 자신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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