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냥’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실수한 사람에게 “왜 그랬어?”라고 묻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그냥”이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이 무책임한 단어에 화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무책임한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떻게 되겠지.’라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나’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당연히 자기가 만든 ‘나’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남이 만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갖 불평불만을 다 쏟아내곤 합니다. 부모님 탓, 조상 탓, 형제자매 탓, 친구 탓, 회사 동료 탓, 환경 탓,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 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남이 나를 만들었을까요? 큰 착각입니다. 자기가 만든 ‘나’를 부정하는 것은 현재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라면서 책임감 없이 사는 우리입니다. 그 결과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지금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바로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고유한 ‘나’를 만들면서 지금을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남 탓, 조상 탓, 환경 탓, 하느님 탓 등을 하고, ‘그냥, 어떻게 되겠지.’ 등의 무책임한 말로 꽁꽁 싸매고 사는 삶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 혼자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언제나 함께하시기 위해 생명의 빵을 매 미사 때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은 빵을 배불러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빵이라는 사실은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거저 주어지는 빵을 계속 먹고 싶어 했기에 하느님의 일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일을 해야 예수님의 빵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실 주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필요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계속 베풀어주신 것은 오로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닌 무상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 자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한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것입니다(성 아오스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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