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미국의 유치원생이 쓴 시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니까 좋다.
바둑이는 나와 놀아주니까 좋다.
냉장고는 먹을 것이 많이 있으니까 좋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끝났을까요? 이 마지막 문장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문장은 ‘우리집에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합니다. 나쁜 직장생활로 집에 밤늦게 들어오고 그래서 아빠 만날 시간이 아이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이 유치원생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또 주님께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의미도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 없는 착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조금이라도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생활이 칭송받을 만한 때에도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죄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타인의 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넣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잘못을 고쳐 줄 마음으로 그 잘못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비판하려고 찾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릴 줄 모르고 타인의 잘못을 곧잘 나무랍니다.”
이러한 겸손을 갖추고 있어야 의미 있는 존재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보다는 나를 드러내고 또 세상에 나를 높이는 데에만 온 힘을 쏟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헤로데 영주 역시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는 데만 온 힘을 쏟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자기 의미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대신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넘겨줍니다. 그 결과는 스스로에게도 비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라고 말합니다. 두 발 뻗고 잠잘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 자기 존재 의미를 깎아버리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의미는 주님의 일을 했을 때 환하게 드러납니다. 즉, 사랑의 삶을 살았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 세상 안에서 자신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하느님이 즐겨 하시는 것을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성 아오스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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