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는, “생명”이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며, 이제 그 생명과 구원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베푸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이는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죽음”과는 반대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항상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께 속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26), 하느님의 본성을 본떠서 만드신(지혜 2,23) 존재이기 때문에 불멸한 존재로 영원히 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드신 분이 아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기적들은 예수님을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해 완전히 함께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복음: 마르 5,21-43: 소녀야, 일어나라!
복음에서는 두 가지 기적의 사화가 함께 소개되고 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과 12년간 하혈하던 부인의 병을 고친 이야기이다. 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죽음과 그 죽음의 일반적 전제조건인 병을 지배하는 예수님의 권위와 그 기적의 근거가 되는 믿음을 북돋우고 있다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사화를 통해서 예수께서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말하고자 하고 있다.
회당장이 예수께,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하고 청한다. 그러나 하혈하는 여인을 만났기 때문에 그 딸의 상황이 치명적인 상황이 되고 만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35절)하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집에 가셔서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3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우선은 그 아이의 죽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극복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주님의 부활과 같이 다른 삶으로 옮아가는 순간으로 보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때(40절)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 “탈리타 쿰”(41절),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하시며 소녀를 다시 살리셨고,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42절) 한다. 이 놀라움은 예수님의 부활 후 무덤 앞에서의 여인들의 놀라움과 같이 표현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과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예수께서 죽음에 대한 권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볼 때, 병에 대한 그분의 권능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참으로 그분의 생명에 대한 능력은 예수님 자신도 조절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이는 힘으로 옮아가듯이 퍼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 이미 여인은 기적을 체험하였다. 바로 생명이 죽음을 지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기”(지혜 1,13) 때문이다.
이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에 대한 북돋움이다. 이 믿음은 더 많은 시험을 당함으로써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딸이 죽은 것을 알고 낙담하고 있을지 모르는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하신다. 아마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고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혈하던 여인도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셨을 때, 어쩌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캐는 듯한 말씀을 하셨을 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33절).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기에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며, 그분과 참된 친교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비를 알게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알려주고 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가치 있는 부,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임을 우리가 안다면, 바로 우리의 현세적인 부를,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누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일임을 바오로 사도는 강조하고 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필립 2,7)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 때, 그분은 우리 생활의 모든 순간, 모든 행동에 새로운 의미를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원하시고 또 항상 초대해 주신다. 여기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게, 굳게 가지도록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살려고 할 때, 그렇게 살 수 있으며, 생명 안에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참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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