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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3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6-23 조회수 : 274

복음: 마르 4,35-41: 왜 그리 겁이 많으냐?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바다가 배경이 되고 있고, 그 바다는 하느님만이 다스릴 수 있으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대상이며, 오직 하느님만이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다스릴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이제 하느님 앞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알아야 한다. 물질만능주의와 과학의 발달은 하느님을 제쳐놓고 그분을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모든 것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앞에 얼마나 무능력한가? 인간은 광대무변하고 찬란히 빛나는 삼라만상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알게 된다. 
 
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티베리아 호수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었던 사도들이 호수의 일시적인 현상을 "죽음"의 위험으로 보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사도들이 갖게 되는 놀라움과 두려움은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표지들이다. 또한 마르코는 예수님 자신의 신비를 발견하고 베드로 사도와 같이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도록 천천히 이끌어 간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우주만물에 대한 권위 자체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광풍을 잠재우시는 분이시지만, 외적으로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은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의 모습과는 달리 온종일 군중들을 가르치신 뒤 너무 지친 나머지 파도 소리나 제자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깊은 잠에 떨어진 분, 그래서 억지로 깨웠어야 했던 분, 그러나 잠깐 사이에 모든 것을 다스리신 분이시다. 이런 나약성과 잇달아 드러나는 권위 있는 행동이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사도들은 감명을 받아 스승이 가지고 있는 '신비'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정말 그분은 나약한 존재이면서도 주님과 같은 권위로써 다만 손짓 하나만으로도 바다의 물결을 잠재우실 수 있는 분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을 항상 우리는 갖게 된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사도들이 마지막 순간에만 배 안에 함께 타고 계신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사실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위험한 순간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와 행동에 항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는 신앙인의 마음에 항상 현존하시게 될 것이며, 신앙인은 하느님을 항상 자신을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으로 발견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주무시고 계신 것 같이 보이지만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 분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초대교회는 이미 박해를 겪고 있었고, 신앙의 시련을 겪고 있었다. 이때 교회의 믿음을 더 강화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이 낡고 지쳐 빠진 것이라 해도 그리스도를 세속적인 표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바오로는 두 가지를 가르친다. 첫째는 신앙의 올바른 차원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신앙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람이었으며, 모든 이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큰 희생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채찍질을 가하면서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고 있는 그 "새로운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손이 닿는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는 그 새로운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고 또한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것은 더는 아무도 단순히 세속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고(2코린 5,16 참조), 성령의 빛과 능력을 통해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온 마음 다해 따르며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복음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하며, 하느님께 언제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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