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없는 결혼생활을 배척하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혼장’이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신명기 24장 1-4절에 근거한 것이지요.
거기 제시된 율법에 따르면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한 남편은 그 여인을 쫒아내기 전에 이혼장을 써야만 했습니다.
이 이혼장을 손에 쥔 여인은 전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혼장은 또한 재혼을 위해 필요한 서류였습니다.
모세는 너무도 문란한 결혼생활, 또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이혼장을 사용할 것을 당부했지만, 유대인들은 이 관습을 남용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이 관습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혼장은 점점 더 남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에게 수치스런 일’이란 원래 아내의 불륜만을 지칭했지만, 후에는 그에 대한 적용이 더 확대되었습니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는 아내, 남편과 말다툼 하는 아내, 친척 앞에서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아내, 베일을 쓰지 않고 외출한 아내, 다른 남자와 말을 하는 아내, 고기를 지나치게 바싹 구운 아내, 국을 끓였는데, 간을 제대로 못 맞춘 아내, 가정사를 남에게 퍼트린 아내 등, 별의 별 이유를 들어 아내를 내쫒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혼장의 악용이 만연하는 가운데, 바리사이파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어떻게 하라고 일렀느냐고 반문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이 법을 제정해 준 것이다.”
이혼장은 유다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고집 센 기질, 굳어진 마음, 문란한 생활, 끝도 없는 타락 때문에 겨우 예외를 허락해 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입법자로서의 모세는 당연히 이혼을 금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일관되게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히브리 민족의 윤리적 타락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사제,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혼인한 사람들입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계약도 맺고 정배가 된 사람들입니다.
한눈팔지 말고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보며 직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해야 할 신랑이신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지 행방을 알 길이 없습니다.
자연스레 눈길을 세상의 좋은 것들로 향합니다.
저희 총장 앙헬 페르난데스 추기경님께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관구 관구장직을 수행할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그곳 교구장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한 협업을 같이 하셔서 지금도 아주 절친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하시는 바나 추구하는 노선이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총장님이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도 거의 교황님 스타일과 비슷합니다.
종종 뼈때리는 말씀도 스스럼없이 하십니다.
최근 보내주신 편지 내용입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탁월한 행정가, 관리자에 앞서 사람들을 동반하고 돌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일 중독에 빠져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 편리하고 안락한 삶에 푹 빠져 살아가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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