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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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살리려는 사람 안에서 말씀은 죽는다
알베르 카뮈의 희곡 중 「오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중부 유럽의 외딴 들판에 한 모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그만 여인숙을 경영하면서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그 집에는 원래 ‘쟌’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 가출하여 지금은 두 모녀만 살고 있습니다.
두 모녀는 가난과 고독에 지친 나머지 이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 여인숙에 투숙하는 손님 중에서 특별히 돈 있어 보이고 혼자 투숙하는 남자 손님에게만
마취약을 먹인 후 목 졸라 죽이고 소지품을 뒤져서 돈과 보석을 빼낸 다음에는 강물에 빠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고독과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서했지만 점점 이것이 상습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장한 젊은이가 투숙했습니다.
돈도 있어 보이고 성공한 남자처럼 보였습니다.
두 모녀는 그 젊은이를 그 날 밤 마취약을 먹인 후 죽이고, 그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다 떨어진 신분증과 사진을 보니, 바로 28년 전에 가출했던 바로 ‘쟌’이었습니다.
‘쟌’인 것을 확인한 순간 모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실신해 버렸습니다.
결국 그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모녀는 ‘쟌’을 죽여 갖다 버린 그 강물에 뛰어 들어 자살을 합니다.
이웃을 죽여 자신의 배를 채우다가는 결국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던 구원자도 죽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또한 말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은 이웃을 죽여야만 하기 때문에 말씀을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생명체든 남을 죽이지 않고 자기 생명을 연명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자고 이웃을 죽이다보면 결국 예수님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자신의 온 전체를 죽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혼과 육체 중, 특별히 육체에 해당하는 욕구, 혹은 육체의 주인인 ‘자아’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또 자아나 육체의 욕구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욕구가 생존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 하느님의 뜻과 맞서게 됩니다.
그러면 말씀이 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봉헌하러 가시는 중인데 그분의 제자들은 누가 높은지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서로 자기가 살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곧이듣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괜히 물어보았다가 정말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알게 되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이 작은이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말씀’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우리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려면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으려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이 이해 될 리가 없습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릴 것이고 심지어 자기 생각에 맞추어 가르침을 왜곡합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고 말씀을 주님으로 모시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죽이십시오.
자신을 죽여야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웃을 받아들이는 만큼 말씀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서학자들보다 마더 데레사가
성경말씀을 더 잘 이해하신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임과 이웃사랑은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