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인가가 창조되는 ‘목표’, 또는 ‘목적’을 뜻하는 ‘텔로스’에 대한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도토리가 자라나 떡갈나무가 되고, 새끼 고양이가 자라서 성인 고양이가 되면 그것들의 텔로스가 달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텔로스는 무엇일까요? 즉 우리 삶의 목표, 목적은 무엇일까요?
가톨릭 교리를 보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서 그분을 섬기고, 하늘 나라에서 그분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궁극의 행복인 것이고, 우리 삶의 목표이며 목적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야 ‘인간의 텔로스’를 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이 길을 벗어납니다. 신앙생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인데도, 자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할 수 없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결국 우리 삶의 목적에 다다를 수 없게 됩니다.
삶은 많은 유혹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화려하고 편한 것들 사이에서 그와 반대로 볼품없고 힘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있습니다. 문제는 화려하고 편한 것만 자기 삶의 첫 번째라고 외친다는 것입니다.
나의 텔로스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도 떠올려 보십시오. 자기 텔로스를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후회와 슬픔만 간직하지 않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로 유명한 요한 사도를 가리키면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보기에, 요한 사도는 특별한 지위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부활의 순간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의 미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미래가 중요했습니다. 즉, 남의 텔로스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의 텔로스를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자기의 목표, 목적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같은 모습만을 보이면서 자기의 목표와 목적을 잊어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따르면서, 특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나의 목표, 목적에 완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미래가 훨씬 밝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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